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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덕후 한국언니 Oct 31. 2024

봄방학의 마지막 날

단편소설 <다시 봄이 오겠지>

마지막주는 느리게 갔다. 입사동기였던 록시와 회사에서도 틈새 수다를 나눌 수 있는 마지막주는 우리의 막내 혜미가 이미 졸업은 했지만 어쨌든 고딩인 마지막주였다. 둘다 수요일이면 신분이 바뀐다. 록시는 우리 회사의 직원이 아니게 되고, 혜미는 이제 성인으로 새출발을 해야한다. 금요일에는 혜미의 입학식이 있을 예정이다.


공휴일을 앞둔 수요일은 주말이나 마찬가지였다. 록시가 퇴사하는 날이고, 혜미의 마지막 봄방학이 끝나는 날이었다. 영화 속 청춘들처럼 가까운 바다라도 보러 가고 싶은 마음도 들어야 하나? 나와 혜미의 머릿속엔 음악만 둥둥 떠다녔다. 우리는 늘상 만나는 치킨집에서 가사 없는 전자음악을 흥얼거리다가 자연스럽게 삼거리 클럽을 향해 걸어갔다.


"혜미야, 입학 축하해."

"이야, 이게 뭐야?"


록시가 록시답게 비밀스러운 표정으로 혜미에게 작고 납작한 상자를 건넸다. 상자는 빨간색과 보라색이 들어간 잔잔한 무늬의 포장지로 탄탄하게 포장되어, 보라색 공단 리본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풀어봐도 돼?"

"어우, 당연하지."


혜미는 걸어가면서도 야무지게 리본을 풀고 포장지를 손상없이 뜯어냈다. 옷을 벗은 상자에는 어디서 본 듯한 작은 로고만 적혀있었다.


"향수같은데?"

"맞아. 성인이 된 너를 위해 언니가 투자했다."

"그럼 오늘은 제가 아이스크림을 쏘겠어요."


혜미는 상자 속 향수병을 열어 가볍게 옷깃에 뿌린 뒤 다시 정리해서 가방에 넣고, 내가 지난주에 선물한 지갑을 꺼냈다. 혜미가 학교생활을 시작하는 입학식 이후로 우리와 멀어질지 가까워질지 알 수 없지만, 무사히 성인이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하는 마음을 담아 복을 부르는 빨간 지갑을 선물했었다.


혜미는 지금도 그 지갑을 보관하고 있을까?


"이 지갑, 한 30년쯤 쓸 수 있을 것 같아."

"아마 그럴거야. 지겨워서 바꿔가며 쓰겠지."

"언니, 나는 퇴사 선물 없어?"

"너는 다른데 취업하면 그때 줄게."


클럽 앞에는 긴 줄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어쩐지 피로감을 느껴 입구를 등지고 몇 발자국 물러나는데, 마침 혜미가 바로 따라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오늘은 좀 늦게 시작해야겠다. 커피나 한 잔 해요."

"난 빨리 놀고 빨리 들어가려고 했는데."


록시는 인파에 질리지 않는 편이다. 그러니 서로를 향해 레이더를 펼치는 우리를 피해 더 복잡한 곳으로 숨어들어서 익명성을 즐길 수 있는 거겠지.


"그럼 너 먼저 다른 데 가서 놀고 있을래?"

"아니야. 일단 커피를 마시면서 생각해보자."


결국 록시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벌컥벌컥 마시고 자리에 앉은지 5분만에 클럽을 찾으러 떠났다. 우리는 커피를 마시며 상황보고를 기다렸다.


"록시언니는 왜 그만두는지 알아요?"

"별 얘기 안하더라고. 복학하는 것도 아니라던데. 생각하고 있는 뭔가가 있겠지. 우리 회사가 그렇게 매력적인 곳은 아니잖아?"


혜미는 일주일만에 그만둔 이력을 지적한다고 생각했는지 살짝 놀라는 것 같았다.


"아니, 난 다녀보고 생각하려고 했는데, 그 주에 하필 일이 좀 복잡해졌어."

"벌써 삶이 그렇게 복잡하면 어떡하냐."

"나는 회사나 조용히 관찰하고 싶었는데, 학교 선배들이 창업하자며 밤새 붙들고 안 놔주는거야. 일요일에 친척 결혼식 다녀와서 뻗었지 뭐."

"창업? 너도 같이 하는거야?"

"나는 투자한 건 아니고. 장소 구하면 최저시급받고 파트타이머 하기로 했어. 아직 알아보는 중이래."

"이상한거면 하지 마. 알았지?"


남 걱정할 처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나처럼 혜미도 자기 발등을 찍는 스타일이라는 직감이 왔다. 그래서 생전 처음으로 누군가를 걱정했다. 걱정이라는 것이 연습할수록 많아진다는 걸 알았다면 싹부터 자르는 거였는데. 나도 그렇지만, 혜미도 강인하게 운명을 헤쳐나갈 것처럼 생겼지만 의외로 사소한 일에 타격을 받고 그 여파가 오래가는 편이었다.


지금은 좀 강해졌을까?


나는 그대로다. 성격이 집이라면, 집이 커진만큼 강하고 촘촘한 벽재로 이루어졌지만 곳곳에 약한 고리가 있어서 작정하고 그 곳만 두드리면 부분적으로 무너질 수 있는 그런 집이다. 무너지지 않을 거란 것을 알면서도 부분적으로 무너질 가능성은 끝없는 공포를 부른다. 이런 집에서 계속 살 수 있을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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