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혜령 <버섯농장>
고통의 대가가 그저 점점 커지는 고통과 가족의 파산과 죽음뿐일 수도 있는데, 실제로 그런 경우가 훨씬 더 많은데, 무엇을 근거로 고통을 견디면 성대한 미래가 올 것이라고 말할까? -264p, 작가의 말
끝없는 이야기에 푹 잠기는게 좋았지만 처음부터 장편만 읽었던 건 아니다. 내겐 셜록 홈즈가 있었거든. 그런데 셜록 홈즈는 장편으로 시작한 시리즈였다. 나중에 어쩌다보니 가끔 단편을 읽기도 했지만 단편에 정말로 맛을 들인 건 그래, 저주토끼였다. 읽다가 당근 꿈을 꿨다. 쇼핑카트 가득 당근이 들어있던 꿈.
마치 예고편처럼 사실은 긴 이야기를 (병풍 접듯이 접어서) 담아내거나 중편에 가까운 (도톰한) 단편을 좋아했던 시간을 지나 환장하는 시그니처를 가진 작가들을 만났다. 마침내 (미루고 미루던) 단편집 <버섯 농장>을 손에 넣었고 이후에 출간된 <소설 보다 겨울 2024>와 <봄이 오면 녹는>, <버섯 농장>의 표제작이 실린 <2023 제14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까지 수집했다. 성혜령 작가의 첫 소설집과 앤솔러지 세 권. 이미 상당수의 수상작을 확보했음에도 마지막에 구입한 수상작품집은 특히 잘 샀다, 라고 생각하던 와중에 ‘버섯 농장’의 해설을 읽지 않은 것이 생각났다.
성혜령 작가의 단편은 초독이 매끄럽고 어느새 끝나버려서 돌아서면 하이라이트만 기억나는데, 여러 편을 누적하다보면 어떤 코어가 드러난다. 물론 대부분의 작가들이 시그니처를 누적해간다. 초기작 모음인 첫 소설집인만큼 작품이 거듭될수록 흥미진진한 포인트가 점점 많아진다. 전에도 그랬나? 하고 돌아가보면 어떤 전조들이 있었다. 그냥 지나쳤던 자연스러운 능청스러움, 결정적 사건을 통해 드러나는 진짜 문제들, 태연한 어조로(사실주의적으로?) 서술하는 스릴러에서 가끔 호러, 가끔 판타지.
무엇보다도 갑자기 끝나서 여운이 남는 동시에 의외로 깔끔하게 마무리되는 마지막 한 수가 있다. 읽는 동안 몰입하고, 막 끝났을 땐 조금 허하면서도 이상하게 뿌듯하고, 며칠 후에는 다시 읽고 싶어지는.
나는 휴대폰을 들고 반야심경을 검색하려다가 타임세일 광고 알림을 보고 들어가 세일하는 운동화를 하나 샀다. -84p, 물가
남미는 조오에게 돈을 갚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곧 극단을 나와 다른 일을,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찾기 시작했다. 조오는 자기가 남미를 구제했다고 믿었고 그 사실을 가끔은 남미보다 사랑했다.
-103p, 주말부부
주름이 매끄럽게 정돈된 삶. 보풀이 인 옷은 버리고 새 옷을 살 수 있는 삶. 단강도 그런 사람들처럼 보이고 싶었다. 단기계약직이더라도 당분간은 그런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것에 만족했다. 전임자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잠시 착각할 수 있었다. -131p, 대체 근무
다시 만나지 않은 게 서로를 위해 좋을 텐데, 순연은 언제나 조금씩 넘쳤다. 약을 팔지만 않았어도 순연과 관계를 완전히 끝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162p, 마구간에서 하룻밤
의문은 곧 미형에 대한 적의로 변했다. 미형이 돈 때문에 아버지와 가까이 지내는 게 아니라면 정말로 아버지가 좋은 사람이라고 믿거나 어쩌면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든 이상했다. 드라마 속 아버지가 과거로 돌아가서도 딸을 살리는 데 실패하고 울부짖었다. 왜 저를 이런 시험에 들게 하시냐고.
시험이구나. -202p, 간병인
<봄이 오면 녹는>의 코멘터리와 두 번의 북토크, 같은 시즌 <소설 보다 겨울>에 실린 인터뷰, <버섯 농장> 말미에 실린 작가의 말을 통해 내적 친밀감이 형성되었음에도 깊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심연(의 입구)에 다다른다. 성혜령 작가의 기묘한 이야기는 연출된 사건을 통해서 각자의 용서받지 못할 마음을 차분하게 드러낸다. 소설을 통해서만 엿볼 수 있는 마음, 혹은 그 또한 연출일지도.
(2023, 2025 젊은작가상 리뷰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