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소연 <사랑과 결함>
왜 사람들을 자꾸 자기가 사는 방법을 알려주려고 드는 걸까. 마치 내가 잘못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127p, 그 얼굴을 마주하고
그를 미워하려면 나 자신 또한 미워해야 하는데, 그렇게만 생명을 지속시키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
-344p, 해설_불가해한 사랑의 스캐닝(오은교)
개입이 곧 애정이었던 사람들이 있다. 가족이라 엉겨있고 가족이 아니라서 아무 것도 아닌데도 어떤 질척임은 내 마음 같아 더욱 끔찍하고 어떤 손쉬운 절교는 거두어들이지 못한 마음을 잘리는 것 같아 아득하다. 멀어진 가족이나 동창도 (뭣도) 아닌 오다가다 만난 사이라면 말해 무엇하리. 마치 바보들만 사랑을 한다는 듯이, 쉽게 훈수를 두던 그 사람도 결국 쉽게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들, 그게 아닌 것을 증명했던 사람들. 달리 기대한 바 없지만 물리적, 심리적 거리는 갈수록 멀어지는 시절의 인연들. 관계에 의무감을 부과하기 싫어서 그냥 당해주고 투덜거리면 (그러면 안되는 것이었다.) 아무나 와서 개입하던 시절들. 묘하게 경쟁해야하는 가족이나 동창과 다르게 편했던만큼 쉽게 멀어졌던 사람들. 아무 사이가 아니었다고는 할 수 없는 사랑들.
뻔하고 뻔한 것들 말고,
나머지 모든 것을 향해 가려진 베일을 활짝 열어젖히는 이야기. 와, 정말 재능이 넘치는 작가야! 라고 동네방네 자랑하고 싶은 마음과 (그러기엔 이미 늦었지만) 나만 알고 싶은 마음이 교차한다. ‘사랑과 결함’으로 문지문학상을 수상하고 ‘그 개와 혁명’으로 이효석문학상과 김유정문학상을 수상한 예소연 작가는 그야말로 혜성처럼 등장했다. 수상 내역은 이미 그녀의 책을 샀기 때문에 (소장작가니까) 알게되었을 뿐, 이 책을 향한 이끌림은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그저 이끌림이었다.
그러니까 견딜 수 없는 마음이 제일 견딜 수 없었다. 나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을 또다른 못 견딜 마음으로 돌려 막고 있었다. 나는 살기 위해 내 삶을 궁지에 몰아 넣었다. -25p, 우리 철봉 하자
나는 엄마를 사랑하고 엄마는 나를 사랑하지만, 우리는 서로를 끔찍하게 여긴다. 엄마는 나를 낳음으로써 가난해졌다. -56p, 아주 사소한 시절
생각해보면 규리는 유독 예민한 아이였던 것 같다. 이미 일어난 일과 앞으로 일어날 일 사이의 묘한 긴장감을 빠르게 알아차리는 아이. 훗날 문득 규리가 떠오를 때면 나는 규리의 부모가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지 생각해보았다. -170p, 사랑과 결함
나는 그런 사람은 생각이 너무 많아서 생각이 자기를 잡아먹고 종국에는 주변 사람들까지 잡아먹게 될 거라고 말해주었다. 그러자 진경이 옐리네크는 좋은 애라고 대꾸했고 나는 어쨌든 가오나시도 주인공에게는 좋은 귀신이었다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291p, 도블
소설을 통해 다른 삶을 대리경험한다. 비슷한 (혹은 어떤 연장선 상에 있는) 삶을 더 선명하게 혹은 입장 바꿔서 다시 경험한다. 단지 읽었을 뿐인데 감각을 확장하는 그 모든 순간에 몰입하게 된다. 완성도 뿐 아니라 진심이 담겨있는 글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경험 이상의 경험을 선사한다.
마침 지난 1년 동안 읽었던 한국소설 리뷰를 브런치북 <인생작가 수집기록 한국편>으로 엮었다. 이들은 지난 15년 또는 요즘을 대표할 수도 아닐수도 있지만 일종의 현대소설 가이드가 될 수도 있겠다. 예소연의 작품을 모아 약 3개월 전에 소설집으로 묶인 이 책에 실린 지난 4년 동안의 작품들은 요즘 또는 현대를 대표할 수도 아닐수도 있지만 (대표한다는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예리하게 저민 삶의 단편을 기어이 경험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