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시와 함께한 여름

이신율리 <호수 빼기 참새>

도서제공리뷰



컵에 맺혀있던 햇빛 조각은 날아갔습니다 폭죽이 터지는 밤으로 가고 있습니다 걷다가 날아오르는 높이에 환호하는 나는 내성적입니다 내가 컵을 깨는 꿈은 아무리 생각해도 길몽입니다

-사다리꼴 삼각형



시를 읽을때 가장 좋은 점은 스토리를 따라가지 못해도 됨이다. 요즘 같은 ‘짧은 집중력’의 시대에 장편소설이나 드라마는 심지어 한 자리에 앉아서 봐도 자꾸 앞부분을 잊어버리고 리마인드를 하게 되는데-그래도 재미있으면 들고 다니면서 보지만-그와 대조적으로 시는 실시간으로 잊어버리면서 읽어도 좋다. 물론 이마저도 시에 따라 다르다.


세상에 ‘이것은 그러하다’는 진리가 아무 것도 없으며 그런 도식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오차를 인정해야 함을 지금쯤은 좀 알아야 할텐데. 만약 그렇지 않다면 시를 좀 읽어야 할텐데. 그런 사람일수록 문학의 의미조차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동해바다를 생각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철썩거리는 스텝 말고 표준코스로 가요

젖지 않는 여름까지

-5분간 정차합니다



시를 즐겨 읽는다고 말할 수 있는 시점은 아직 올듯말듯한 근미래이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필사노트를 핑계삼아 가끔 한두 편, 가끔 몰입해서 반 권 정도 읽던 시집이 어느덧 책탑이 되었다. 지난 달에는 얼추 사흘 간격으로 펼치면 한 권 정도의 분량을 읽거나 서너 편의 시를 여러 번 음미할 정도는 되었다. 시에 관한 소설, 소설에 관한 평론을 읽다 보니 시에 대한 문턱이 낮아지기도 했다.


용기를 내어 시집 선물을 받아봤다. 시를 경유한 여행은 사실주의적 산문이나 탄탄한 판타지 세계관처럼 논리적이지 않다. 일종의 고증 오류 같은 것이 필요 없는 안전지대이기도 하다. 재해석에 탁월한 작가들이나 언어의 천재들은 ‘시적 허용’이라는 찬스를 즐길 것이다. 나만 그런가? 실제로는 시와 별로 깊은 관계를 맺지 않고 있는데도 그렇다.


시를 읽는 동안 마인드 팰리스의 이곳 저곳을 순간이동하는 걸 좋아하게 되었어도 시를 좋아한다고 말하기는 여전히 어렵다.




나는 새콤하게와 익숙하게를 경멸한다 자라거나 익기를 거부한다

-우선 화요 파스타



시어가 가로지르는 시공간은 어쩔 수 없이 우주적이다. 시인이 아니더라도 인간은 피아를 동시에 떠올릴 수 있다. 산문은 그 사이에 징검다리를 놓아야 하는데 이 작업은 단순노동에 가깝다. 인류가 단순노동이나 단체노동을 하는 동안 음악과 춤과 시가 태어났다. 태초에 음악과 시를 짓다가 살아남기 위해 노동을 했을지도 모른다. (모든 건 확실하지 않으므로) 그러나 리듬감과 단순노동의 관계는 춤이 되고 스포츠가 되고 시가 되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무엇이 먼저 등장했을지 항상 궁금하지만 알아내는 일에는 서투르고 알아내고 나서는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언젠가 내가 기억하지 못한 일 때문에 파멸할지 모른다는 심리적 공포에 종종 사로잡힌다.




여름이 여름의 둘레를 재는 동안

팔월은 사방을 허물어 쓰러지기도 하는데

-각시투구


​​팔월에 도착한 시집은 남은 여름에 그늘 한 조각을 선사했다. 여름에 만난 조금 두꺼운 시집들과 그간 모아둔 시집을 꺼내보고 기억나지 않는 시를 다시 읽었다. 시를 읽어보려고 애쓰던 어느 날을 기억한다. 그리고 2025년 여름은 평생 처음으로 수백 편의 시를 읽은 계절로 기억해야지.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