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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 읽기 좋은 시집이라면

안희연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살아 있음,

나는 최선을 다해 산 척을 하는 것 같다

실패하지 않은 내가 남아 있다고 믿는 것 같다

-업힌


눈부시게 푸른 계절이었다 식물들은 맹렬히 자라났다 누런 잎을 절반이 넘게 매달고도 포기를 몰랐다


치닫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라는 듯

-망종



여름이 시작하는 날 태어났다. 여름의 첫 절기-立夏에 시작한 생이라 여름에 집착했다. 차가운 음식과 가벼운 옷차림, 특히 맨발로 신을 수 있는 신발을 신고 다니기를 좋아했다.


웃자란 여름은 성급한 사랑이 찾아오기 전 조숙한 읽기로 너무 많은 걸 알게 했고 새해에 한 살, 여름에 한 살 더 먹은 아이는 너무 일찍 야망을 키웠다. 이십대를 꼬박 연기하듯 살았다. 나로 사는 방법을 찾느라 수없이 많은 밤을 지새웠다.


목적이 없어야 산책이다. 돌아올 곳 또는 파티할 장소는 대략 정해져 있었어도 먼 길로 돌아가거나 예정에 없던 경유지를 찾았다. 글쎄 왜 그랬을까.




지금껏 왜 작다고만 생각했을까

올려다봐도 얼굴이 안 보일 만큼 큰 것일 수도 있는데


쉬지 않고 움직이는 구름들

너머의 얼굴을 상상한다

-자이언트


서랍을 열면 황금빛 새가

죽은 듯이 잠들어 있고


모두가 새의 황금빛을 이야기할 때

죽은 듯이라는 말을 생각하느라 하루를 다 쓰는 사람

-나는 평생 이런 노래밖에는 부르지 못할거야



파란 하늘에 흰구름이 가득한 날은 여름이겠지만 여름엔 볼 것이 많아 하늘까지 챙겨보지 않았다. 하늘이 눈에 들기 시작한 건 6년전 가을, (돌림노래같은) 시카고의 추석이었고 봄에는 맑은 실내, 여름엔 에어컨을 찾아 헤매느라 하늘을 계속 잊었다.


하늘만 봐도 뭉친 마음이 연해지는 것을, 뻥 뚫린 언덕에 오르기만 해도 숨이 맑아지는 것을 이제야 조금 알게 되었다. 지구의 위기가 여름을 더 힘들게 할지라도 늦게 깨우친 여름의 비밀을 오래 간직할 수 있다는 것에 남몰래 안도한다.


아직 보내줄 준비가 되지 않았다. 며칠전까지 헐벗고도 눈사람처럼 녹아내리던 날이 이어졌다. 아직은 긴팔을 입고 싶지 않다.




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솔직해져야 했다

한쪽 주머니엔 작열하는 태양을, 한쪽 주머니엔 장마를 담고 걸었다

-열과(裂果)​


​땀이 비오듯 흐르는 장면은 만화적이지만 욕망이 여름날의 땀처럼 흐르는 장면은 익숙하다. 예전만큼 여름을 사랑하지 않는다. 욕망하는, 욕망했던 상상만 해도 에너지가 소진된다. 겨울을 바라는 건 아니지만 여름에 설레지도 않는다. 그저 얼었다 녹고, 녹았다 얼어버리는 마음에 영원히 농락당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땀을 흘리지 않겠다는 무모한 결심은 하지 않는다. 땀을 흘리는 것이 목적인 것처럼 얼음물을 들고 산책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결과는 그리 좋지 않았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좋았다고 믿는 수 밖에 없다.

​여름에 시를 읽었다. 백 편 이상 읽었다. 그림이나 음악, 소설에서 즐겨 읽는 과학과 논리를 찾을 수 없어서 목적없이 산책하듯 읽었다. 소리내어 읽어야지 하다가도 매번 잊어버리고 졸면서 읽었다. 서늘해지면 시집을 쌓아놓은 것마저 잊어버릴지 모르니 읽었다는 흔적을 여기저기 남겨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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