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무진 <인 더 백>
누워 있던 시체가 상반신을 일으킨 채 앉아 있었다.
-175p
하나 더 묻지. 여기 다섯 명이 죽어 있다. 그럼 달아난 놈은 몇명이냐? -191p
소설 속에서 시체가 움직이려면 ‘개연성’이 있어야 한다. 망자가 살아있는 자에게 아주 조금이라도 영향을 줄 수 있는 세계관을 설득하거나 기이한 현상을 납득시킬만한 초월적인 힘을 설정한 상태로 이 장면을 위해 치밀하게 전개해야 한다. 곧 망자의 혼을 대면해야하는 나의 주인공에게 ‘준비됐냐?’고 묻고 싶은 날이다. 어떤 이의 혼을 만날지까지도 정했는데, 정작 만나는 순간이 너무 작위적이면 이제껏 쌓아올린 공든 탑이 무너질지도 모른다.
독서모임 300과 함께 읽고 차무진 작가님과 가까이서 직접 이야기를 나눈 <인 더 백>을 통해 지금, 여기와 허구의 세계를 연결하는 장치를 보다 세밀하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첫 관문이 되어주었던 <다이버전트>라는 소설 원작 영화는 시카고 고가철교를 배경으로 폐허가 된 계획도시에서 시작된다. 아직 시카고에 발 딛기 전이었고, 어쩌면 이 영화를 통해 포스트 아포칼립스와 시카고 덕후가 되었을지 모른다. 드라마 <설국열차>가 그러하듯, 시카고는 (얼어붙은) 세계 육로의 중심이자 실제와 허구가 교차할만한 포털이다.
<인 더 백>에는 교회가 있다. 충주에 있는 교회라면 아주 오래된 건물은 아니다. 작품 속 배경이 지금보다 미래이긴 하지만 화산폭발 직전까지 지금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한반도를 배경으로 그 이후를 보여준다. 그러니까 세상이 망하기 전에 지어진 건물에서 벌어지는 일은 현실세계와 연결되는 것이다. 다른 버전으로 판타지 소설 <해리포터>의 킹스크로스 역이나 <섀도우 헌터스>의 브루클린 클럽 역시 그런 포털이 되었다. 가상세계와 연결되는, 있을 법하거나 실제로 있는, 결국 역사적인 문학투어의 장소가 된. 그리고 가끔 그런 곳에서 우리는 허구를 실제처럼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허구 속의 허구는 어떨까?
<인 더 백>의 주인공인 동민은 이미 죽은 아내의 환영과 허구에 관한 허구적인 대화를 한다. 그리고 꿈을 꾼다. 비록 영화처럼 모든 장면이 예산을 잡아먹는 건 아니지만 소설 속에 등장하는 꿈은 그냥 꿈이 아니다. 물론 읽는 동안 매번 이 꿈들을 다 해석하지는 않는다. 다 읽고 나서야 ‘아아!’ 이러면서 퍼즐을 맞추게 되는 경우가 많다.
충주 다음은 문경, 동민은 작지만 격한 사건들을 경험한다. 역사를 바꿀지는 모르겠으나 개인에게는 너무도 처절한 시간들. 어쩌면 소설이라는 포털을 통해 가상의 타인에게 접속해야하는 이유는 이런 것이다. 여기까지 들어와야 독자는 그에게 오롯히 몰입할 수 있다. 그의 입장이 되어본 후에야 그를 이해하고 응원하거나, 비판적으로 지지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누구라고 별 수 있을까?
이때 죽은 아내의 존재는 그야말로 큰 힘이 된다.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외로울 수 있는 시간, 망자의 외로움에 과몰입하느라 더 괴로울 수 있는 유족, 어쩌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망자의 외로움을 대신 감각하는 유족의 마음을 간접경험해본다. 아주 가까운 이의 빈자리를 느끼고 그의 영혼과 소통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지만 이것이 유족의 마음과는 또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이야기를 논픽션으로 읽고 쓰려는 용기를 내기는 어렵다. 그럴때 위로가 되는 것도 픽션이다.
사랑을 지나, 기어이 인간의 본성까지 나아가는 이야기. 신파가 아닌 척 하기보단, 신파임을 인정하되 그 너머를 보는 이야기라 더 소중했다. 좀비 디스토피아 장르가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존재’를 공통의 적으로 하는 다양한 인간군의 전쟁이라면 식인 바이러스의 핵심은 내부에 있다. 불가능한 설정이길 바라지만 좀더 현실적이다. 밀도 높은 독서모임이라서 여기까지 생각해볼 수 있었다.
만약 식인 바이러스가 상징하는 것이 정신적인 공격성이나 혐오라면? 그게 전염되는 것이라면?
생각해볼 문제가 아주 많았던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