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일기 아니고 전원스릴러

류현재 <빼그녕>

“것 봐. 갸는 우리 백씨가 아니여.

빼씨잖어, 빼씨.“ -267p



태어나는 순간부터 보고 들은 모든 것을 기억하는 천재 소녀 빼그녕. 할마와 송아지 프랑크를 사랑하지만 엄마 아빠 동생들에게는 복수할 날만 기다린다. 어리다고 무시할 땐 언제고 왜 맨날 장녀한테 다 시키냐고! (어? 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장면이다.)


배꽃처럼 웃는 춘입과 샘 아저씨를 만나 얼리어답터 대안가족처럼 알콩달콩 사는가 했더니 프랑크가 사라지고, 샘 아저씨마저 사라진다. 게다가 빼그녕은 춘입과 춘입을 시골에 데려온 법대생이 배밭에 시체를 묻는 장면까지 목격하는데….


서로 돌대가리라고 싸우느라 천재인 걸 숨기고 평범한 척 하는 장녀가 자신들을 놀리는 줄도 모르는 부모로부터 어른을 믿을 수 없다는 걸 일찌감치 깨달은 빼그녕은 일련의 시험을 거쳐 춘입, 샘 아저씨, 그리고 춘입의 본 남편(?)인 법대생과 친해지고 우정과 사랑(의 스펙트럼)과 의리를 배운다. 배밭 주인인 법대생의 부모가 죽고 춘입이 구속되고 동네 사람들의 음모가 드러나기까지 정신없이 달렸다. 모든 걸 기억할 뿐만 아니라 책으로 이미 대학과정까지 선행한 미취학 아동의 예리한 시선 때문에 빼그녕과 친구가 될 수 있을 법한 독자라면 깔깔 웃으면서 절절한 눈물을 흘리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아 그런데 대체 이게 몇년도냐구요…일단 읽어봅시다.)


순수를 가장하지만 실리와 정치에 민감한 시골 어른들을 몽땅 구속시키겠다는 빼그녕의 포부는 과연 이루어질까?




”아주 천재 나셨네. 산골 오지 송백리에서 이렇게 똑똑한 천재가 났는데 왜 여태 내가 몰랐을까?“

”가정환경을 생각해 내 천재성을 드러내지 않고 그냥 평범하게 살기로 했으니까요.“ -205p


똘배는 내 친구는 아니지만 내 친구인 춘입의 남편이니까. 아니 진짜 남편도 아니지만……춘입을 사랑하는……아니 그것도 아닌데. 춘입을 때렸던 나쁜 놈인데. 그래도 손이 하나밖에 없으니까 잘 봐주세요. -230p



​미스터리와 소프트 오컬트, 여기에 현대사까지 서사의 핵심 요소로 작용하지만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굳어버린 마음의 시간을 돌려보는 경험. 어쩌면 당신의 공감력을 시험해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빼그녕의 시험을 통과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