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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덕후 한국언니 Mar 09. 2023

매운맛 길모어 걸스라니, 기대되는 걸?

미드 <지니 앤 조지아>와 아시아계 배역들

백인 중산층이 모여사는 서벌브를 배경으로 비밀과 거짓말이 겹겹이 쌓여있는 예쁜 집이 등장한다. 이와 같은 클리셰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시뮬레이션 게임 <심즈>와 평행세계인 서벌브 도메스틱 스릴러 드라마 <위기의 주부들>이 있었다.


밀레니엄 이후로 지금까지도 부쩍 인기있는 서벌스 도메스틱 스릴러 소설을 원작으로 제작된 블록버스터 드라마인 <빅 리틀 라이즈>와 스릴이 없어도 너무 없는 20세기 바이브의 <길모어 걸스>를 스릴러화 한 <지니 앤 조지아>가 동시대의 대표작이다.  



네가 덜 중요한, 널 진지하게 여기지 않는, 널 위해 설계되지 않은 세상에서 사는 일은 힘겨운 거야.


비밀과 거짓말로 무장한 사연 많은 싱글맘 조지아는 <위기의 주부들>이 살고있는 마을에 막 도착한 전학생, 아니, 전학생 엄마인 베티 애플화이트 또는 앤지 볼렌처럼 수상하다. 위스테리아 레인과 스타즈 할로우처럼 가상의 마을인 웰스버리에 등장한 수상한 이 가족은 대놓고 <길모어 걸스>를 패러디하는 밀러 걸스 '지니'와 '조지아', 이들에게 사연 한 스푼을 추가할, 꼬마 '오스틴'으로 구성된다.


패밀리 네임인 밀러는 지니 아빠 자이언 밀러에서 비롯되었지만 지니 엄마 조지아, 자이언을 만난 곳 조지아에서 즉흥적으로 가명(?)을 만들어냈고 본명은 아무도 모른다. 마침 조지아가 좋아하는 <길모어 걸스>의 로리 길모어의 이복동생 GG의 풀네임이 조지아 헤이든이다. 로리는 서류상으로 엄마의 이름 로렐라이 길모어를 그대로 물려받지만, 지니는 본명을 싫어한다. 조지아 밀러로 재탄생한 엄마가 버지니아에서 낳았다고 버지니아(=지니)가 된다. 스무살 조지아는 어린 지니와 도망다니다가 오스틴에서 오스틴을 낳았다. 자이언은 조지아를, 조지아는 지니를 피치(조지아주 닉네임)라고 부른다.




수학여행 가는 길에 가출 청소녀 조지아를 만나 예쁜 선글라스를 주고 헤어졌던 '조'가 사는 곳, 웰스버리에 다 커서 이사온 지니와 조지아. 청각장애인 아빠와 퀴어, 우울증 환자인 쌍둥이 남매가 살고있는 옆집 가족과 묘하게 잘 통한다. 엄마끼리, 엄마와 옆집 아들, 딸과 옆집 딸이 베프가 되고 딸과 옆집 아들은 각자의 애인을 두고 몰래 만나다 들켜서 대소동이 벌어진다.


이렇게 시즌1이 비장하게 끝나고 어중간한 시기가 오는데 지니의 베프인 옆집 딸 맥스가 지니와 애비에게 등을 돌리고 지니는 자해의 빈도가 높아지며 지니와 조지아 교착상태가 한동안 계속된다. 지니의 아빠가 비밀리에 정신과 상담을 지원해주고 옆집 아들 마커스와 안정적인 관계로 거듭나며, 애비를 시작으로 친구들을 하나씩 되찾지만 이 과정에서 극의 속도가 마구 처지다가 다시 탄력받을 때 쯤에는 마커스가 걷잡을 수 없이 우울증에 빠진다.

 


꼬마 오스틴을 엄마로부터 지켜주려는 지니 누나


시즌 1의 주요 사건은 사설 탐정이 따라다니면서 심증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아이들이 엄마의 비밀을 알아버리는 것. 시즌 2에서는 살아있는 피해자(?)인 오스틴 아빠가 등장하면서 조지아의 목줄을 조여온다. 한동안 애아빠들이 들락거려서 조지아와 약혼 후 막 동거를 시작한 폴은 허수아비였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역시 폴은 멋있었다.


시즌 1의 여운이 남았을 때 작성한 블로그 리뷰에서도 밝혔듯이, 남성 캐릭터들도 '폴'처럼 기존의 진부함*을 타파할 필요가 있다. 같은 <지니 앤 조지아>에서도 '자이언'과 '조'는 <길모어 걸스>의 크리스토퍼와 루크와 거의 판박이**다. 다만 지니 아빠가 아프리칸 아메리칸***이기 때문에 당연히 지니도 흑인 혈통이고, 그래서 백인중심적인 서벌브에서 조지아도 모르는 스트레스를 받는데 이 모든 게 조지아 본인이 누리지 못한 청소년기를 지니에게 주기 위해서라니. 어쨌든 백인 엄마의 이기적 모성애와 사랑받는 딸의 이기적 반항심은 곧 타협한다.



*식상한 장면을 연출하는 '클리셰'와 판에 박힌 역할을 소화하는 '스테레오 타입'은 비백인, 여성, 성소수자들이 갖혀있는 틀을 더욱 단단하게 만든다는 비판이 있다. 그러나 당사자가 인식하기 어렵고 투쟁하기는 더욱 어렵기 때문에 맨 박스(man box)에 대한 지적은 미미하다.  폭력 남편, 소름끼치는 연쇄살인범, 잘생긴 바람둥이, 조폭...남자들도 더 다양한 역할을 하고 싶지 않을까?


**크리스토퍼는 사랑하는 로렐라이와 결혼해서 함께 로리를 키우고 사랑해주고 싶었지만 로렐라이가 단호하게 떼어낸 것으로 설정됐고 이로부터 길모어 '걸스'의 주체적인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크리스토퍼 캐릭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자이언은 스테레오 타입이다. 좀더 헌신적인 순정파로 등장하는 식당 주인 루크와 조는 클리셰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흔해빠진 캐릭터지만 작품에 빠져들면 함께 빠져들 수 밖에 없는, 인테리어 같은 존재.


***가족 식사 장면을 보면 알 수 있는데, 피부가 검은 밀러 가족은 최소 50년 전에 안정된 뉴잉글랜드의 엘리트 집안이다. 오히려 조지아가 속칭, 백인 쓰레기에 해당하는 남부 빈민층 출신이다.

모두가 죽음을 향해 피할 수도 돌이킬 수도 없게 그저 천천히 전진하고 있어.


<지니 앤 조지아>는 이방인 조지아, 유색인종인 지니가 여러 겹의 펜스를 마주하게 될 것을 예고하는 백인 부자 동네라는 갈등요소를 안고 시작했다. 그럼에도 이곳에는 지니를 반겨주는 흑인 언니들이 있다. 아마도 공정한 캐스팅이라는 작품 외적인 요소에 의해, 대만계* 혼혈인 지니의 전남친 헌터 첸, 맥스와 마커스의 전여친**들, 조지아와 그 자녀를 꿈의 마을 웰스버리로 이끈 '조' 사장님 등  아시안 아메리칸***도 다수 등장한다.


우정보다 사랑 중심으로 스토리를 전개한 결과, 지니와 맥스와 애비의 친구인 그러나 아시안 아메리칸인 '노라'는 시즌 2에서 단역 수준으로 떨어진다. 시즌 1의 리뷰에서 노라의 활약을 기대했었기 때문에 특히 이 부분이 아쉽다.




*헌터의 부모님을 만난 자리에서 장기자랑으로 한국어를 선택한 지니의 어색한 귀여움은 한국인 또는 동북아시아인으로서 황당한 포인트이기도 했다. 아직도 '그들'의 동양에 대한 감수성은 이모냥.


**이들은 정황상 인도계로 보이지만 실제로 인도와 서남아시아 등의 인종구성에 대해서는 우리도 잘 모른다. 영어가 모국어인 이들도 많겠지만 미디어에 정식으로 노출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이다. <다이하드3>의 사무엘 잭슨처럼 누가봐도 흑인이거나 <길모어 걸스>의 레인 김 모녀처럼 누가봐도 동북아시안으로 보이는 스테레오 타입과 다르게 갈색피부 남아시아인의 캐스팅은 그동안 눈에 띄지 않았고, 최근 남미계와 함께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백년 동안 주구장창 엑스트라만 하다가 조연을 건너뛰고 주연을 맡은 상황이다.   


***그러니까, 이들 전부를 함부로 아시안 아메리칸으로 부르면 안 된다. 그럼에도 갈색피부 아시안의 인종적 정체성을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아니, 적절하게 표현하기에는 우리의 배움이 너무도 부족한 것이다. 갈색피부로 퉁치는 것도 너무도 북태평양적인 사고방식이다. 백인들이 우리 전부를 뭉뚱그려 중국인, 남방계를 인도인이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특히 한국인은 동남아시아를 멸칭으로 쓰는 경우가 많다. 내가 들었을때 기분나쁜 지역주의적 분류는 하지 않아야 한다.

스포일러 가득한 장면이니 설명은 않겠지만, 지니의 의상은 최고였다!


<루머의 루머의 루머>처럼 트라우마와 치유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작품은 아니지만, 이 작품 역시 특히 청소년의 정신 건강을 비중있게 조명한다. 고전적인 엄마 역할에 대한 편견*은 빼고, 현대적 관점에서 언니같은 젊은 엄마, 그런데 파란만장한 인생. 한참 민감한 시기의 아이들이 납득할 수 있을까?


<길모어 걸스>의 로리나 <위기의 주부들>의 줄리처럼 지니와 오스틴은 조숙한 아이들이지만 아이들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그저 납득할수는 없다. 그런 스토리들은 아이들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다.


시즌 2의 마지막 장면은 관객만 알고 등장인물들은 모르는 상황이다. 유일한 목격자인 꼬마 오스틴의 멘탈이 무사할까? 이 친구도 특히 시즌 2를 거쳐 강할대로 강해져 있는 상태지만 그럼에도 아직은 어린 아이의 '엄마라는 세계'와 '세계속의 엄마'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게 될지가 시즌 3의 숙제다.

(다음편에 계속)




*예를 들어, 싱글맘 드라마 중 거의 최초로 엄청난 대중화에 성공한 <길모어 걸스>의 경우에도 당시에는 시대를 앞서간 작품이었다. 일반인 리뷰어의 글에서 로렐라이가 하나뿐인 딸의 먹을거리를 너무 안 챙겨주는 것을 지적하는 부분을 발견한 적이 있다. 아니, 이 드라마의 컨셉이 그거 아니었나? 잔소리하면서 밥 주는 엄마 말고, 밥 안주는 친구같은 엄마. 자녀에게 올인하는 레인의 엄마(한국맘 스테레오 타입)처럼 과자도 못 먹게 하는 엄마 말고, 하루종일 과자랑 피자랑 아이스크림을 같이 먹어주는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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