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표 웰메이드 막장 <위기의 주부들>
서벌브 도메스틱 스릴러*의 고전이자 <가십걸>과 함께 대표적인 2000년대 미국 드라마인 <위기의 주부들(2005-2012)>은 영어교재로도 많이 활용되는 작품이다. 주부와 남편들의 대사와 일상적인 동작 및 이벤트 묘사,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다양한 마을 주민들의 표현을 볼 수 있다. 특히 부부를 중심으로 애정관계에 있는 다양한 커플, 수많은 ex-와 양다리, 게이와 양성애자 등을 포함한 기본 사각관계 이상의 심리를 코믹하게 묘사한 장면이 많다. 그러나 시트콤 또는 가족드라마라고 하기엔 진지한 살인사건과 미스터리가 많아도 너무 많은 작품이다.
처음 등장하던 2000년대 중반, 특히 한국에서는 막장드라마로 인식되기도 했다. 그런데 그 비슷한 시기에 나왔던 광고인 듯 광고 아닌 원조 뉴욕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나 <가십걸>보다 훨씬 (현실적으로) 진지하다. <리벤지> 같은 더 최근의, 더 황당한 드라마들은 이 작품에서 고부갈등과 같은 가정 내의 권력 다툼 등 스타일만 차용한 경우가 많다.
누가 뭐라해도 막장은 망작이 아니다. 의도적으로 또는 본의아니게 막장이라는 외피를 쓴 드라마들이 지목한 주로 '한국과 미국'의, 특히 '시월드'라는 너무도 현실적인 상황을 보라. 특히 그 시절의 핵가족들, 그들의 정상가족으로부터 시청율을 흡입하는 인기요소가 망가진 가족의 막장이라는 사실이 오히려 정곡을 찌른다. (결혼은 미친짓이야.)
*이때부터 싱글보다 기혼녀로, 따뜻하다못해 지루하기는커녕 더욱 미스테리해지는 주부의 비밀을 다루는 가족드라마의 본격적인 시점 이동이 나타나고 더불어 <나를 찾아줘> 등 도메스틱 스릴러로 볼 수 있는 (상당수가 영상화된) 소설이 대거 등장했다.
<위기의 주부들>은 삽십 대와 사십 대가 보는 킬링 포인트가 다를 것으로 예상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처음 정주행했던 삼십 대 중반에는 가브리엘(이하 개비) 역의 에바 롱고리아에게 완전히 반했다.
여러 번 재주행을 하면서 개비에게 점점 답답함을 느꼈지만 현생에서의 애정생활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삽십대 후반의 5년이 한결같고 평화로운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정말 복 받은 것이다. 그 시기에 어떤 변화들이 가능할지 미리 보고 싶으면 멀리 갈 것도 없이 바로 <위기의 주부들> 속 등장인물, 특히 삼십 대로 등장하는 개비와 수잔을 보면 된다.
재주행을 거듭할수록 자꾸 마음이 가는 캐릭터는 바로 완벽한 주부, 브리다. 브리는 세제광고*에 나올 법한 완벽한 단독주택의 아름답고 우아한 현모양처를 구현했지만 바로 그 이유로 남편과 멀어지고 자녀들에게 온갖 수모를 당한다. 그렇게 시작된 브리의 수난시대가 이 작품의 시청율을 견인했다.
브리가 행복해질때까지 기어이 이 작품을 완주할 시청자들을 위해(?) 제작진은 브리를 굴리고 또 굴리고, 벼랑 끝까지 밀어부친다. 너무도 완벽했다가 너무도 바닥을 뚫고 내려가버리는 브리는, 현실에 존재하기 불가능한 인물이다. 그럼에도 자포자기한 그녀의 뒤늦은 방황은 나이들어가는 세상 모든 장녀와 범생이들을 위로했을 것이다.
*브리의 첫 남편이자 아이들의 아빠, 렉스 밴 드 캠프가 '우리 가족'의 문제로 브리의 완벽주의를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무슨 세제광고도 아니고!"
<위기의 주부들>의 사운드 트랙은 라이프 스타일 시뮬레이션 게임 <심즈>의 사운드 트랙과 같은 뮤지션이 작곡했다. 건설 시뮬레이션의 대표작인 <심시티>의 서벌브 버전이자, <프린세스 메이커>로 대표되는 육성 시뮬레이션과 결합한 <심즈>는 마을과 그 구성 가족을 만들어가는 게임이지만 게임에 내장된 이웃들은 <위기의 주부들>처럼 수상하다.
오지라퍼들은 옆집에서 어떤 계량컵을 쓰는지 알고, 이웃들이 그런 물건을 갖고 있기만 하고 안쓰면 장기 대여를 해버린다. 사별하고 이혼한 여성이 혼자 사는 집에서 매일 아침 다른 남자가 나오면 걱정하는 친구와 흉보는 적들이 있다. 정작 하얀 울타리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서벌브의 수상함을 표현한 미국의 지역주의 대표작인 그랜트 우드의 <아메리칸 고딕>과 너무도 세제광고 같아서 소름끼치는 라이프 스타일의 키치함을 상징하는 앤디 워홀,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그림들을 패러디한 오프닝은 한없이 가벼운 '아메리칸 스탠다드'를 살짝 우회해서 비웃는다. 대체로 가장 기복이 심하지만, 그렇기에 전성기에는 가장 부유했던 개비의 집에는 워홀이 그린 듯한 그녀의 초상화 시리즈가 부자 남편과 함께 갓 서벌브에 도착한 모델 출신인 새댁의 허영을 집약해서 보여주고 있다.
사별한 브리는 운명의 짝을 만나지 못하고 고생하지만 개비와 수잔, 르넷은 그럭저럭 운명의 짝을 만난 것 같다. 반복되는 외도와 이혼, 그럼에도 카를로스와 개비는 열정이 식지 않는 사랑으로 위기를 헤쳐나간다. 밥&리 커플이 등장하기 전까지 이 구역의 다문화 담당이었던 솔리스 집안이 바람기도 많고 정도 많은 라티노스, 라는 클리셰도 떠안았지만 크리에이터 마크 체리의 후속작 <은밀한 하녀들>을 보면 개비의 활약이 미국 드라마와 남북 아메리카 대륙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첫 화, 파일럿에서 위스테리아 레인의 새로운 주민인 싱글남 마이크를 만나고 시즌 사이의 건너뛴 시간을 포함해 13년 동안 '마이크 되찾기' 프로젝트 하나만을 밀고 나간 수잔은 덕분에 조금은 주체적인 사람이 된 것 같다. 남녀불문 누구보다도 커리어 욕구가 강한 르넷은 너무도 잘 통하는 톰을 만나 5남매의 엄마와 광고계의 거물이라는 양립하기 힘든 역할을 (동시에 했다기 보다는) 왕복한다.
르넷과 톰의 별거가 이 작품의 최대 위기였을 것이다. 아이도 남편도 내겐 너무 큰 프로젝트인데 5남매와 혼외자식과 자식같은 연하남을 거두느라 청춘을 바친 르넷이 다시 싱글이 된다고?
물론 그녀는 육아퇴근과 데이트를 즐긴다! 그럼에도 우리는 톰을 용서할 수가 없다. 이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동안 들었던 착한 남편 칭찬을 다 토해내라고 따질 판이다. 르넷으로 대표되는 히스테리적인 금발 여성 클리셰와 톰의 철없는 백치미는 때때로 답답했지만 두 사람의 지고지순함은 다른 커플들의 양다리에 지친 시청자들의 오아시스였다.
워낙 쟁쟁한 명품조연들을 발굴해서 어마무시한 인기를 누렸기에, 2005년 이후에 방영한 어지간한 드라마에는 <위기의 주부들> 출연진의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위기의 주부들>의 단역이 주연이나 레귤러로 등장하는 <캐슬>, <매드맨>에는 해당 인물 외에도 여러 배우가 중복해서 출연하므로 숨은 배우를 찾는 재미도 있다.
<캐슬>의 타이틀 롤인 미스터리 작가 리처드 캐슬은 바로 <위기의 주부들>에서 가장 수상한 주부였던 캐서린의 두번째 남편 애덤이었다! 결국 이혼하게 되지만 끝까지 최선을 다했던 애덤처럼, 보기보다 지고지순한 리처드가 사랑하게 되는 '케이트' 베켓의 본명도 캐서린이다.
<매드맨>의 진주인공 페기 올슨(훗날 마거릿 애트우드가 후속작을 쓰고 두번째 부커상을 받게한, 거장 배우 겸 디렉터가 되는 엘리자베스 모스)의 잠깐 썸을 타는 남자선배 중에는 <위기의 주부들>에서 게이 주부로 나왔던 리가 있다. 의도치 않게 르넷과 톰의 재결합을 방해할 뻔 했던 리가 게이로 등장했을때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매드맨>에서는 또 그렇게 핫해 핫해. 심쿵했잖아.
<매드맨>에는 놀런 로스(가브리엘 만)도 나오고, 엘리자베스 모스가 <핸드메이즈 테일>로 모셔가는(?) 로리 길모어(알렉시스 브레델)도 나오고, 꼬꼬마부터 사춘기까지의 사브리나 스펠먼(키어넌 십카)도 나온다! 그보다도 서브 주연인 로저 스털링이 바로 <위기의 주부들>의 진주인공 개비의 두번째 남편, 빅터 랭(존 슬래터리/하워드 스타크)이었다.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