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드라마 <리벤지>와 연결고리들
Before you embark on a journey of revenge, dig two graves. -confucius
두 개의 무덤을 언급한 공자의 명언으로 시작하는 미국 드라마 <리벤지(2011-2015)>는 뉴욕주 사우스햄튼(브루클린과 퀸즈에서 이어지는 롱 아일랜드의 동부 럭셔리 해변 휴양지)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도메스틱 스릴러이다. 치밀한 음모를 겨냥한 치밀한 복수를 기획하는 에밀리와 전폭적인 조력자 놀런은 여러 스테레오 타입을 융합한 결과로 뜻밖의 개성을 가지게 된 캐릭터다.
에밀리와 놀런은 법으로 해결하지 못했던 오래된 사건을 셀프로 잠입수사한다. 억울하게 죽은 데이비드 클라크의 복수를 위해. 그의 투자로 성공한 IT 덕후와 고아로 내던져지고 잊혀진 딸이 만났다. 놀런 로스는 패셔너블한 양성애자(어딘가 어색한 게이 패션은 잊어라!)와 속은 여전히 너드인 해커(약간의 애정결핍, 특히 부성 결핍은 덤.)를 결합한 씬 스틸러로 등장했다. 거의 모든 것을 가진 듯한 아름다운 상속녀 에밀리는 클라크 집안의 생존자 아만다가 창조한 위장 캐릭터고, 밤에는 닌자로 변한다.
한국에서는 <아내의 유혹> 미국버전이라는 별명이 있는 <리벤지>의 오프닝/엔딩 크레딧은 매들린 스토라는 중년 여성 배우로 시작한다. 빅토리아 그레이슨 역할을 맡은 그녀는 시뮬레이션 게임 <심즈3>의 아바타처럼 생겼는데, 2000년대 후반에 알고리즘이 집계한 미국의 이상적인 미녀의 얼굴일지도 모르겠다. 복수의 주체인 에밀리의 입장에서 아버지의 연인이었다가 시어머니로 다시 만난 빅토리아는 음모의 핵심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부수적인 피해자임에도, 두 여성의 기싸움이 시청율을 견인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시즌이 거듭될수록 다소 억지스럽게 대장몬스터를 떠맡은 빅토리아의 반격이 이어지고, 음모를 향한 에밀리의 복수는 결국 빅토리아를 제거해야 완성되는 시나리오로 망가진다.
고부갈등이라는 아침드라마같은 클리셰가 작품성을 훼손한 것은 사실이지만 막장은 망작이 아니다. 한국식으로는 웰메이드 막장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심각하게 죽고 죽이는 도메스틱 스릴러인 한편 슈퍼리치에게 아부하는 부르주아들의 파티에서 빛나는 소셜리스트 에밀리와 놀런, 빅토리아의 패션은 런웨이가 따로 없다. 좀더 은근하고 업그레이드 된 <가십걸> 스타일의 거대한 의류 광고일까?
국가적인 음모와 큰 사건이 벌어질때는 맨해튼으로 전용 헬기를 타고 이동하지만 월스트리트 출신의 슈퍼리치들이 상주하는 사우스햄튼은 (맨해튼에는 없는) 넓은 부지와 함께 막대한 부동산을 제공한다. 주요 배경인 세 주인공 에밀리, 놀런, 빅토리아의 집은 꿈의 별장이거나 저택이거나 거의 성이다.
블로그에도 포스팅했던 놀런의 집은 뉴욕이 아니라 캘리포니아의 말리부에 있는 풀하우스로 필모그래피가 화려한 부동산이다. <가십걸>의 인물관계도를 차용한 한국 드라마 <상속자들> 주인공인 김탄의 별장으로도 등장했고, 도메스틱 스릴러의 정수를 담은 소설 원작의 미국 드라마 <빅 리틀 라이즈> 주인공 중 가장 부자인 레나타의 집으로도 등장했다.
에밀리의 집은 럭셔리 하우스는 아니지만 클라크 부녀의 추억이 깃든 곳이자 특유의 안락함으로 시선강탈을 하는 곳이며 <심즈3>의 건축모드로 재현해본 적이 있다. 해변의 별장(summer house)이 아닌, 대저택(manor)으로 불리는 빅토리아의 집은 <레베카>의 맨덜리 저택처럼 무대장치로 작용한다.
그레이슨 집안과 잘못 엮이는 데클란 포터는 <가십걸>에서 세레나 동생 에릭 역을 맡았던 코너 파올로이다. 비록 가명이지만 에밀리와 애슐리 역을 맡은 배우의 이름도 에밀리와 애슐리다. 에밀리의 아역을 맡은 에밀리 앨린 린드는 2021년 <가십걸> 리부트의 주연을 맡기도 했다. 에밀리 성인역의 에밀리 반캠프는 <가십걸>의 평행우주인 <상속자들> 김탄 역의 이민호와 약간 닮았다.
데클런 포터의 형이자 두 에밀리 사이에 낀, 잭 포터 역의 닉 웨슬러는 애틀랜타 배경의 또다른 슈퍼리치 드라마 <다이너스티>에서 캐링턴 집안과 잘못 엮인 매슈 역을 맡기도 했다. 잭은 세 주인공 다음으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탑 조연인데, 아키에너미인 빅토리아와 마찬가지로 스토리의 긴장감과 재미를 위해 일관성이 희생되는 캐릭터다.
가장 큰 희생을 치른 캐릭터는 애슐리이다. 슈퍼리치 드라마의 클리셰이기도 한, 외국인 집사처럼 등장한 그녀는 에밀리와 빅토리아를 연결해주는 역할을 한 뒤, 그레이슨 집안의 필요에 따라 이용당하다가 부자들의 사악함과 본인의 야망이 잘못 만남으로 타락하고 퇴출당한다. 주요 인물 중에서 애슐리가 거의 유일하게 흑인 혼혈인 것은 다들 모르는 척 하는 분위기다. 어쩌면 일종의 외국인 노동자라서 그러려니 해야할지도 모르겠지만, 출신국이 아일랜드도 아닌 영국*이라서(무슨 맥락이지?) 당황스럽다.
*에밀리가 에이든을 처음 만났던 곳의 화장실에서 애슐리도 처음 만나는 회상씬이 있는데, 에이든도 영국인이기 때문에 이때부터 시작된 서사들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에이든과 달리 애슐리의 과거는 제대로 등장하지 않는다. 그레이슨 집안에서 혈연 중심으로 스토리를 전개하다가 애슐리의 포지션이 점점 설자리가 없어졌고 그로 인해 제작진 혹은 배우의 출연의지가 없어져서 하차시킨 것으로 보인다.
<리벤지>로 존재감을 널리 알리게 된 놀런 로스 역의 가브리엘 만은 <본 아이덴티티> 시리즈와 <데이비드 게일>등 많은 작품에 출연한 베태랑 배우다. 초창기에는 주로 단정하고 스마트한 미소년 역할을 맡았는데, 여전히 그 얼굴이 유지되고 있어서 몇년 전에는 40대 후반의 나이로 <블랙리스트>에 아역으로 출연했다. 게다가 그 직후 <왓/이프>에 능청스러운 중늙은이로 출연하며 연기 고수다운 변신을 보여주었다.
<리벤지>로 입문한 그의 필모그래피가 나의 미드 취향에 주요하고 결정적인 요소가 되고 있다. 도메스틱 스릴러, 스파이 스릴러와 시대극까지 그의 필모 탐구는 세부 장르로 통하는 문을 열어주었다. 그를 통해서 알게된 뉴욕 드라마 <매드맨>과 같은 작품은 엘리자베스 모스라는 다른 배우를 통해 드라마 <핸드메이즈 테일>로 연결되어 원작 소설 <시녀이야기>의 후속작 <증언들>을 계속 읽게 하는 동력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마거릿 애트우드를 인생작가(롤모델)로 삼게 된 결정적인 한 수를 제공한 연결고리가 바로 인생배우(이상형)인 가브리엘 만이었고, 그 시작은 우연히 <리벤지>를 클릭하고 공자의 말씀에 빠져들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