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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덕후 한국언니 Mar 11. 2023

백인 부자 동네 비벌리힐스를 마음껏 비웃어라

남미풍 미드 <은밀한 하녀들>

라틴 아메리칸 혈통의 라티나들이 단체로 주연을 맡은 <은밀한 하녀들>은 철저하게 백인 중심적인 미국 드라마들의 클리셰를 정면돌파하며 신선한 파문을 일으켰다. 크리에이터 마크 체리의 유명한 자매 드라마 <위기의 주부들(2005-2012)> 주인공 중에서 유일한 유색인종*인 '가브리엘'은 딸들의 양육 과정에서 이 구역의 백인성을 감지하게 된다. (정확하게는 남편 카를로스가 지적한다.) 다른 주부들과는 달리 험난했던 그녀의 유년기가 스릴러 요소로 떠오르면서 히스패닉 여성의 삶을 암시한다.


<위기의 주부들>은 백인 중산층으로 이루어진 보수적인 서벌브를 배경으로 하지만, 이 좁은 세계를 직면하도록 유도하는 장치들이 자주 등장하고 나름 자기비판적인 모습을 보이기에 미워할 수 없는 작품이다. 아쉬운 점이라면 가브리엘의 친구들**은 그녀가 친구라서 아끼는 것일 뿐 그녀의 인종 정체성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극중에서도 외부적으로도 안타깝게 하차한 이디의 포지션에 르넷 친구 르네, 라는 흑인 여성이 레귤러로 등장했으나 애초에 이디는 레귤러임에도 주연 취급을 못 받고 있었고 그 자리를 물려받은 르네 역시 은근히 소외되는 별종으로 남았다.


**시즌이 계속되는 13년 동안 가장 많은 변화를 보여주는 브리의 경우,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고 아들의 커밍아웃에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해 모자 사이에 거대한 앙금을 가지고 시작한다. 브리는 가브리엘을 사랑하고 카를로스에게 마음의 빚이 있어서 큰 희생을 치를 결심도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 친구들의 경제력이 비슷한 수준이었거나 적어도 한쪽은 여유가 있는 형편이었기에 가능한 우정이었다. 같은 구역에 살지만 서민에 가까운 르넷, 수잔과는 달리 대체로 중산층을 유지하는 브리와 가브리엘은 이방인에 대해 좀더 배타적인 경향이 있다.

<위기의 주부들>의 스포일러 모음 :)


그런 가브리엘이 작품의 내부는 물론 외부에서도 인기 스타였기 때문일까? 남미를 겨냥한 듯한 <위기의 주부들> 리메이크 버전들은 물론, 가브리엘 역의 에바 롱고리아가 제작에 참여한 자매 드라마 <은밀한 하녀들(2013-2016)>은 철저하게 라티나들의 서사를 중심에 둔다. <위기의 주부들>에서 정원사와 외도한 적이 있는 가브리엘을 약올리기 위해, 부부의 입장이 바뀌어 카를로스가 주부가 되었을 때 미녀 정원사를 고용하는데, 그녀가 바로 '카르멘 루나'이다. 다음 해에 이어지는 <은밀한 하녀들>에서 그녀는 가수 지망생이자 인기 라틴팝 스타의 집에 하녀로 취업하는 푸에르토리코 여성 '카르멘 루나'로 환생한다.


출연진 중 일부가 겹치지만 다른 배역들은 두 작품에서 전혀 다른 배역으로 등장한다. 전작 <위기의 주부들>에서 카를로스를 유혹하는 수상한 수녀는 카르멘이 취업하는 집의 집사이자 부상당한 전직 러시아 발레리나 '오데사'로 등장하고, 수잔의 남자 마이크는 마리솔과 썸타는 부자 사업가로 등장한다. 가브리엘은 극중 배우인 페리와 함께 연기 호흡을 맞추는 라틴계 배우 '에바 롱고리아' 본인으로 등장한다. (난 '위기의 주부들'에도 출연했다고!) <은밀한 하녀들>의 주인집 사모님 중에서도 특히 시선강탈을 하는 에블린은 전생에 <위기의 주부들>에서 다름아닌 '브리'의 엄마였다.        


마리솔, 에바 롱고리아, 페리, 로지


<은밀한 하녀들> 에블린의  하녀가 의문사를 당하고  진범을 잡기 위해 용의자로 수감된 피해자의 남친의 엄마인 '마리솔'  구역의 엘리트 하녀로 위장잠입을 하면서 시작된다. 실제로는 영문과 교수인 마리솔은 이민 경력이 얼마  , 하녀라는 역할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건방지다, 어휘력이 너무 고급이다' 등등의 평가질을 당하지만(빡침 포인트) 정작 그녀를 고용한 테일러는 남편의  부인을 쫒아내는  도도한 하녀의 카리스마에 반해서 마리솔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한다.


하지만 이것도 유색인종 여성의 억척스러움에 의존하는 전형적인 백인 여성 클리셰다. 심신미약의 화신인 제네비브는 오랜 세월 친구처럼 함께 지낸 하녀 '조일라'에게 의존하는 정도가  심하다. 제네비브의 아들인 레미를 짝사랑하는 조일라의  발렌티나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주인집 아들을 공략한다. 한편 못된 페리의  하녀 '로지'  집의 꼬꼬마 아들을 돌보면서, 아내보다 일이  들어와서 한가한 배우인 '미스터 스펜스' 눈이 맞는다.


청춘남녀인 발렌티나 커플보다도  불길한 이들의 삼각관계는 점점 주요사건으로 떠오른다. 스펜스는 <다이너스티> 가부장 블레이크 캐링턴으로 출연했다. 블레이크는 스펜스와 마찬가지로 못된 전처(위주부의 아웃사이더인 '이디' 역할을 맡았던 바로  배우) 라티나 후처를 만나는 남자(얼떨결에 바람둥이).   




주연을 맡은 다섯 명의 라티나 중에서 엘리트인 마리솔 역의 애나 오티즈와 조일라 역의 주디 레예즈는 뉴요커, 발렌티나 역의 에디 가넴은 맥시코계 캘리포니안이지만 멕시코와 스페인을 거쳐 샌디에고, LA 이주했다고 한다. 카르멘 역의 로즐린 산체스는 현생에서도 배우  가수, 작가, 감독인 푸에르토리코 여성이고 로지 역의 다니아 라미레스는 10세에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뉴욕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발렌티나, 조일라, 마리솔, 카르멘, 로지


주인집 식구들 중에도 에블린, 제네비브   작품에서 부각되었으나 베테랑인 백인 배우들이 많다. 카르멘의 고용주는 흑인이지만, 그녀를 괴롭히는 사람은 러시안 집사인 오데사이다. 우리나라와 달리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동유럽인과 유대인은 기득권을 상징하는 '백인'이라고 보지 않는 분위기인데,  쇼비니스트와 인종차별주의자들이 같은 하얀 피부에 속해도 이들을 유색인종처럼 배제해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반인종차별주의자들도 이들에게 백인성을 굳이 부여하지 않는다. '백인' 하얀 피부를 가진 사람이 아닌, 기득권을 수호하는 서유럽 혈통을 의미하는 것이다.


라티노스와 마찬가지로 '쉽게 지워지는' 아시안인 우리가, 동유럽인을 배려할 처지(?) 아니지만 부유한 흑인의 집에 러시안 집사와 라티나 하녀가 있는 오데사와 카르멘의 집을 보면 경제적 서열과 인종의 복합적 관계를 간접적으로 경험할  있다. 스펜서가 주연으로 등장하는 <다이너스티>에도 라틴계 처가와 흑인 친척들을 비롯해 인종차별주의자인 할아버지가 라틴계 며느리와 라틴계 하녀를 도발하면서 열받게 하는 장면이 나온다.


하녀에게 '자네가 있었을 수도 있는 자리다'라는 말은 같은 인종이면서도 낮은 계급에 머물고 있는 하녀 모욕 동시에 하녀와 묶어서 취급함으로써 며느리를 무시한 것이. 복합적인 의미를 가지는 언어 공격을 알아채려면 그들이 타자화하는 인종을 어떻게 생각하고 대하는지 알아야 한다. 어쩌면 모르는  약일수도 있지만.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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