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이야기
9년 전, 도명제약에서 일할 때 같이 일했던 최훈을 마주한 창준.
느긋하게 걸어온 그가 악수를 청했다. 마주잡은 손바닥에서 맥박이 팔딱팔딱 뛰었다. 뜨거운 손바닥의 온기가 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피와 열기를 뺏어가는 것 같았다.
나는 행여 괴롭거나 처절해 보이는 표정을 짓지 않으려 노력하며 눈앞의 이를 보았다.
최훈이 그런 나를 보고 웃었다.
허술한 사람이다.
내가 그녀를 제대로 마주하고 느낀 첫인상은 그것이었다.
깨달았다는 얼굴로 흐르는 땀은 내버려 둔 채 상자를 들고서 인사를 하는 모양새가 그랬다. 그러면서 상자에서 개인용품이 우수수 떨어지는 것이 그랬다. 황망하게 팔자를 그리는 눈썹 모양새를 보며, 우리네 전공을 하면 알만한 상이란 상은 다 휩쓸었다는 ‘이수진’이 정말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이 맞나 싶었다.
조금의 시간이 지난 뒤 수진의 그러한 점은 '자신이 속한 분야'외 한정적인 부분에서만 통용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나였지만, 그때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 날 처음 발을 디딘 '제약내외기록입출입관리부'는 자그마한 동네 상점을 생각나게 하는 곳이었다. 작은데도 오밀조밀 필요한 모든 것이 있을 것 같은 공간이랄까. 보는 순간 그런 이미지가 각인됐다. 실제로 그곳에서 일하면서 그 이미지가 사실이라는것을 깨닫기도 했고 말이다.
당시 도명제약은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강소기업이었다. 대기업에 비하면야 작은 회사였지만 신설기업에 속하는 만큼 건물은 매끈하며 반질거렸고 외관으로만-크기는 제외하겠다- 따지면 대기업 못지 않았다.
제약회사답게 깔끔하고 청결한 이미지와 대비되는 ‘제약내외기록입출입관리부’의 사무실 풍경은 생경하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12층 종합기획부옆에 '제약품출입부'라는 명확한 명칭을 가진, 힘 있고 그럴싸한 부서가 있었기 때문에 3층 '제약내외기록입출입관리부'는 솔직히 말해 그 존재의의를 어필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사내 인프라를 찾아보아도 제약품의 내외기록 입출입을 관리한다는 어처구니없는 설명만 나와있을 뿐 정확한 실체에 대한 느낌이 매우 부족했다. 나는 그걸 보고 과연 이런 부서에 예산편성이 되기는 할런지 궁금해졌다.
'제약내외기록입출입관리부'는 '제록부'라고 불렸다. 수진은 요령없이 매번 제약내외기록입출입관리부 라는 호칭을 입에 담았다. 그러면서도 발음은 항상 정확했다. 그렇게 부르는 게 힘들지 않냐는 물음에는 어째서 이것이 힘드냐는 무례한 눈동자가 나를 보았다. 결국 부르기 힘든 내가 만들어낸 별명이었다.
“되게 귀여워요. 제록부.”
그 말 때문이었을까? 별다른 생각없이 줄여놓고서도 나는 그 이름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처음 봤던 제록부의 운치를 설명하자면, 잡다하게 길어서 요점이 보이지 않는 이름과 운명을 나란히 하듯 난잡했다. 들어서서 고개만 길게 내빼고 봤을 때 가장 독특한 건 우리가 들어온 입구쪽이었다.
어디서 구해온 건지 출처를 알기 어려운 오래된 고목나무 책장 위에 여러 가지 자료들이 딱보기에도 정렬되지 않은 채 뒤죽박죽 꽂아져 있었다. 들쑥날쑥 삐져나온 맨 위 선반의 A4용지를 바라보면서 나는 내가 어디에 와있는지 잊을뻔했다. 혹시나 싶어 다시 밖으로 나가보았지만 하얀색 대리석이 깔린 황량하게 넓고 반질한 복도는 분명 내가 다니는 '도명제약'이 맞았다.
여긴 다른 공간인가?
막상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들어가 보니 공기마저 다른 것 같았다. 약간 먼지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곰팡이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어, 신입!"
신입까진 아닌데.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사실 너무 놀라 그럴 수 없었다. 사람이 없어보였던 구석 책상-그곳에 책상이 있는지도 나중에 안 사실이다-에서 낯선 얼굴이 불쑥 튀어나왔다. 오래된 물건을 꺼내 들었을 때 날리는 먼지가 뭉게뭉게 피어나길래 그때까지도 뭔가를 잘못보았다고 여겼다. 희멀건한 인상의 그는 마찬가지로 희멀건하게 웃었다. 대체 무슨 표현이냐 싶지만 당시의 그 모습을 본 누구라도 적당한 말을 찾기 힘들었을 것이다. 쓰다만 듯한 검은 뿔테안경이 그의 코끝에서 아슬아슬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저러다 흘러내릴 것 같다.
"..안녕하세요!"
활기찬 목소리가 제록부 내부에 울려 퍼졌다. 열심히 모니터만 바라보던 직원들이 고개를 들고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다. 물론 들은 체도 하지 않고 할 일에만 열중이신 분들도 더러 있었다.
의외로군.
나는 나보다 머리하나 아래의 수진을 잠시 빤히 보았다. 복식호흡을 한 사람한테서 나올법한 우렁차고 맑은소리가 인상적이었다. 나는 발령에 큰 의미를 두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절대 동기들보다 안 좋은 자리로 간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내게 어딘가 특출난 구석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기에 어설프게 침잠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수진에게는 이곳에 오게 된 것이 행운이었다. 새로운 시작이었다. 신나거나 의미있는 일이었다. 그 선명하고 깨끗한 목소리만 들어도 알아졌다.
그때까지 잠겨있던 내 기분은 새로운 국면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내 시선을 인식한 수진이 나를 살짝 보더니 웃었다. 들어와서 내려놓겠다던 상자는 여전히 손에 든 채였다.
"어..어,어,어..잠시만. 내가 정리를 한다는 것이, 어.어. 여기가 왜 이렇게,"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아래에도 뭔가 걸리는 더미가 많은지 허우적대는 뿔테안경을 보다 못한 내가 서둘러 구원에 나섰다. 이 사람은 여기서 한 번도 나가지 않은 건가? 말도안되는 의심이 들만큼 넓지 않은 공간은 험난했다. 내 도움을 받아 겨우 밖으로 나온 뿔테안경은 그제서야 자기소개를 했다.
"반갑다. 나는 최훈이라고 해. 제약기록내외입출입관리부에 온 걸 환영한다."
그는 길고 긴 부서의 명칭을 끊기지도 않고 정확히 말했다.
내 기억에 의하면 제록부 총인원은 대략 20명 정도였다.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인원이었다. 나와 그녀가 들어오게 되었으니 22명 정도가 되는거다. 뿔테의 이름을 듣는 동시에 그의 직급이 과장이라는 것을 기억해냈다. 새로 온 부하직원 앞에서 자신을 먼저 소개하는 과장을 나는 처음 보았다.
"오늘부로 발령받은 이수진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신창준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래그래. 반가워. 내가 오늘 너희들 인수를 맡았는데..잠시만."
뿔테는 정리 안된 서류들 중 정확히 한 부분을 끄집어내더니 펼쳐본다. 빠르게 굴리는 눈알이 어느 부분에서 멈추고 유심히 보더니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일단 이리로 오면 됩니다. 여기가 수진씨랑 창준씨 자리."
"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일단 정리는 해놓았는데 먼지가 좀 있을 거야. 가져온 소지품 정리하고, 오후에 한 번 견학을 갔다오는게 빠를거같네. 일은 어렵지 않을건데..음, 원래하던 업무랑은 조금 성격차이가 있을지도."
내 자리와 그녀의 자리는 옆으로 나란히 앉는 위치였다. 바로 맞은편에 있는 자리가 뿔테의 자리로, 이리저리 둘러봐도 보통의 사무실인 이 공간에 이채를 띄게 만드는 고목나무 책장의 주인은 그인 모양이었다. 심지어 책상은 오리나무였다. 대체 무슨 조화인건지.
워낙 짐이 간소한지라 짐 정리를 하는데에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대충 청소까지 끝내고 나서야 나는 주위를 둘러볼만한 여유가 생겼다. 머릿속 생각들이 이리저리 회전을 시작하는 것이 느껴졌다. 앞으로 일할 내 자리. 옆자리 잘나가는 선배. 왠지 괴짜로 보이는 뿔테안경의 과장까지.
"저기..?" 내가 말했다.
"네? 아 저요..?"
"여기 혹시 지원하신거예요?"
“..아, 그런건 아닌데...”
"아,네."
어색하다.
“마음에 드는 것 같아요.”
“네? 여기가요?”
‘도명제약’이 제시하는 비전. 회사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 그런 것을 보고 골랐다면 절대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나도 모르게 크게 되물었고, 수진은 그런 나를 의아하다는 듯 보았다.
“네. 그렇지 않나요?”
너무나 똑바로, 내 눈을 보고 다시 한 번 묻는다. 그런..가? 수진의 시선에 압도당한 나는 바보같이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잘해봐요. 파이팅!”
“파이팅..”
여긴 괴짜들만 모이는 곳인가. 제록부에 처음 온 감상은 심심하게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