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중고신입은 무슨 일을 하는지 잘 몰랐습니다
지난 이야기
제록부-제약내외기록입출입관리부-에 발령 난 과거의 창준.
동료인 수진과 함께 담당부서 과장인 최훈 밑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잘해봐요. 파이팅!”
“파이팅..”
여긴 괴짜들만 모이는 곳인가. 제록부에 처음 온 감상은 심심하게 끝이 났다.
오후에 들어온 뿔테는 우리를 데리고서 30분정도 차를 몰고 나갔다. 시외로 나가는지 주변의 풍경이 점점 자연에 가까워져갔다. 33분정도 지났을때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멀리까지 가야 하나요?"
"하하. 지루하지? 근데 이제부터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 대부분 이런식일텐데. 조금 익숙지면 괜찮을거야."
가끔 있는 이벤트성 출장이 아닌 건가? 대답을 요하는 내 시선에 뿔테는 설명을 시작했다.
그 말에 의하면 앞으로 우리-라는 건 최훈도 포함되는 모양이었다-는 일종의 파견성 업무를 맡을 예정이라고 했다.
12층 제약품출입부는 내부 제약품출입을 관리하지만 제록부는 하청업체 및 외부 기관에 제약품을 전달하고 그 기록을 관리하는 전반적인 업무라는 것.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왜 제약품출입부가 그런 일까지 하지 않는 것일까.
아무리 들어도 제록부의 업무가 이 회사에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와닿지 않았다. 이수진이 여기로 왔으니 이 부서는 특별할 것이라고 나도 모르게 짐작했나보다.
차가 멈췄고, 우리는 어떤 건물 앞에 내렸다. 하얀 가운을 입은 몇몇 사람이 우리를 마주하러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고 반갑습니다”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고 악수를 건네길래 얼떨결에 인사를 했다. 옆을 보니 어안이 벙벙한 건 그녀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모든 게 준비되어 있는데 우리만 준비되지 않은 기분이었다.
건물 내부에 하얗고 어쩐지 섬뜩한 기운이 미미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곳이 병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그곳은 병원이 아니었다. 도명제약의 준하청업체쯤이라고 보면 되려나? 듣자하니 멀끔한 건물을 들여놓은 건 좋았는데 영업이나 운영부분에서 수완이 많이 부족했다고. 그래서 약품의 연구와 도소매를 진행하고는 있으나 특별한 성과 없이 있는 곳이라고 했다.
성과도 없는 이런 건물을, 아무 대책 없이 지어놓은데다 그냥 두고 있다고?
의문점은 있었지만 구태여 묻지는 않았다. 회사에서 일어나는 일이 무릇 그러하듯, 개개인이 이해하려 하면 힘들어질 뿐이다.
내 옆에 있던 그녀는 뭔가 생각하는 듯 보였지만 '어떤 부분인지는 몰라도 어느정도는 납득했다' 라는 아우라를 풍기고는 최훈을 졸졸 따라갔다. 나도 물론 최훈을 졸졸 따라갔고 말이다.
엄마오리와 그 뒤를 따르는 새끼오리처럼 우리는 그가 발 디디는 곳마다 영문도 모른채 따라다녔다.
앞으로 하게 될 일은 대략 이러했다.
도명에서 일정 리스트의 필요약품을 이곳으로 보내고, 우리가 최종점검을 한 뒤 제대로 나갈 곳으로 납품한다. 납품지마다 어떤 종류는 빠지고, 반대로 어떤 종류는 추가되기도 한다. 그 중간 과정에 간단한 시약이라던가 초기 납품이면 그 업체가 적정한지의 여부 등을 체크리스트에 따라 확인한다. 약품 자체의 검증이나 간단한 실험도 진행할 수 있었다.
말만 들어서는 그다지 어려운 일은 없어보였다. 그 전까지는 야근도 특근도 많은 부서였어서 이렇게 단순해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한가지 신경쓰이는 점이라면, 이곳엔 우리가 앉아서 어떤 업무를 진행할만한 공간은 없어보였다. 반쯤 포기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다시 돌아가는 길에 그가 말했다.
"아 맞다. 지하 1층에 자네들 사무실이 있으니까 기본적으로 거기 있으면 돼. 중앙 계단으로 내려가서 바로 오른쪽. 오늘은 못가봤네? 하하하."
이 상사는 신뢰도를 높게 잡으면 안될 것 같다.
뿔테와 다시 차를 타고 회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진 후였다. 간단히 회식을 하자고 바로 불려나갔다. 신입이라 우렁차게 인사하고 그다음부터는 주거니 받거니. 부어라 마셔라. 죽어라..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집이었다.
"으으으..."
나는 양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섰다. 어떻게 해결이 안되는 숙취에 온몸이 욱지근 거렸고 머리가 뱅뱅돌았다. 토할 것 같다. 물에 담근 솜처럼 늘어진채 휘청거리며 냉장고로 다가가 생수를 왈칵 들이켰다. 너무 차가운 물을 벌컥벌컥 마셨더니 찌르듯 관자놀이가 아파서 바로 후회했다.
다행인건지 아직 여명이 밝지 않은 새벽이었다. 오늘이 주말이 아니고 평일이라는 사실. 아무리 퍼붓고 마셨어도 업무 첫날부터 지각이라니..그럴 순 없다. 주위는 어두컴컴했고 고요했다.
시간을 보려고 켠 핸드폰 불빛에 눈이 절로 찡그려졌다. 그래도 환한 불빛 속에 빨려들어가듯이 시선을 멍하기 스크린에 주시했다. 4시 45분. 부재중 2통. 문자 3통. 부재중 전화는 모르는 전화번호였다. 아마 대리운전이나 그런거겠지. 문자 3통 중 하나의 발신인에 '뿌ㄹ태' 라고 쓰여있었다. 언제 저장했던거지..전혀 기억에 없다. 아마 최훈 과장인가보다.
'첫날부터 수고 많았다. 푹 쉬고 내일보자.'
꿈뻑꿈뻑. 문자는 오전 1시 37분으로 그 도착시간을 알리고 있었다. 뭐야 나 겨우 세시간 잔 건가?
그 외에도 제록부 폴더-그새 이런 폴더까지 만들어놨던 모양이었다-에는 자음과 모음이 따로 노는 번호가 여럿 저장되어 있었다.
'이수진'
누가 누군지 구별하기 힘든 전화번호부 속에 그녀의 이름만이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다른 번호는 이름도 아니고 대략의 첫인상, 그러니까 예를들면 '판ㄷ', '까두긱' 등 적당히 희미하게 떠오르는 인상만으로 저장해놓은 반면 그녀의 이름은 그런 특징 없이 담백하기만 했다.
나는 그 이유를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특징이라.. 나를 멀뚱히 쳐다보던 동그란 눈동자가 떠올랐다. 맞아. 전구에 불을 켠 듯 번쩍거렸던 것 같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랬다.
거기까지 생각을 마쳤을 때 솜처럼 무거운 졸음이 밀려왔다. 아직 조금 더 잘 수 있겠지. 다시 허우적거리며 침대에 몸을 내팽개치듯 던지는 동시에 나는 잠에 빠져들었고, 결국 그 날은 지각했다.
최훈 밑에서 수진과 일한 지 3개월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최훈은 여전히 커다란 뿔테를 코끝에 걸고 다녔으며 수진은 그런 최훈을 졸졸 따라다녔다. 나는 그런 수진의 발끝을 바라보며 따라가는 게 주된 일과였다.
수진은 언제나 조금 신난 것처럼 발끝을 가볍게 통통거리며 걸었다. 저러다 허공에 붕 뜬다고 해도 믿을 만큼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나는 항상 그녀 뒤에 서서 걸었으므로 그녀의 뒷모습은 내겐 아주 익숙한 실루엣이었다. 볼 때마다 하얀 가운 자락이 갈라지는 마지막 부분, 앉아있는 시간이 길었는데도 구김살 하나 없어 매번 신기하게 여기곤 했다. 고개만 빽 돌려 내 가운만 봐도 옷의 주름살을 생생히 볼 수 있었다. 아침에 다림질을 하고 와도 마찬가지였다.
간단한 업무라고 생각 했던 건 역시나 오산이었고 나는 세세히 파고들자면 어떤 일도 귀찮음의 끝판왕이 될 수 있으며 누구의 골머리도 썩힐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제록부에 와서 비교해보니 회사 내부에 있는 사람들은, 적어도 같은 회사 직원으로 묶여있는 관계에서는 정도란 것이 있었다. 소속감과 친밀감도 존재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땐 나도 모르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만큼 업체는 냉소하고 노골적으로 우리를 싫어했다. 갑의 입장이던 을의 입장이던 공통된 사항이었다. 우리는 회사가 아닌데도 그랬다.
일주일이면 익숙해질 거라 생각한 루틴 업무를 3개월째 수진과 함께 물어보며 배워가다 보니 우리 셋은 기차처럼 붙어 다녔다. 나란히 걷자니 키가 제일 큰 내가 쌩뚱해보였고 두 번째로 걷자니..그건 그냥 싫었다. 게다가 내가 가려버리면 안그래도 질문이 많은 수진이 최훈한테 질문하기 어려워질 터였다.
그런 어중간한 상태에 머무르다보니 쓰리콤보로 걸어가는 모양이 습관처럼 자리 잡았다. 수진은 최훈의 사선에서 언제나처럼 발을 통통거리며 걸어갔고, 쉴 새 없이 물어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수진의 하얀 가운 자락을 무심히 쳐다보며 걸었다. 무거운 내 발걸음이 그녀를 튕겨 버릴까 보폭을 조금 넓게 걷다 보니 그 또한 습관이 되었다.
최훈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도 모든 질문에 아주 구체적으로 빠르게 대답했는데, 듣는 이에 대한 배려는 완전히 배제한 말이었다. 저걸 어떻게 알아듣나 싶었지만 수진은 항상 아 그렇군요 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 그렇군요. 그걸 보고 있자면 괜스레 비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대놓고 티는 내지 못한채 어쩐지 입을 삐죽이며 입모양으로만 흉내 냈는데 맞은편에서 오던 직원 한명과 눈이 마주쳤다.
그럴 때면 나는 눈알을 또르르 굴려 다시 그 가벼운 발끝을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