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뭐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by 은자루

차 한 잔 값으로 카페에서 제일 전망 좋은 자리에 앉아 차 두 잔을 마시며-그것도 한 잔 가격으로- 하루 종일 있다가 집에 가는 것이 미안하기도 했고, 아무렇지 않기도 했다. 집에 가서는 최소한의 생활적인 일을 하고 잠이 들었다. 다음날엔 다시 카페에 갔다.




내가 밥을 먹었던가? 멀쩡히 살아있으니 밥을 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억나지 않았다. 어느 날 나는 주인장과 나란히 앉아 밥을 먹은 장면을 떠올렸다. 그와 나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나는 밥을 먹었지만 맛은 기억나지 않았다. 그건 기억뿐이었지만 아마 나는 밥을 먹었을 것이다.


나는 오래도록 나의 과거에 대해 생각했다. 그때 내가 두고 온 게 무엇이었는지 생각했다. 수진을 많이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를 떠올리지는 않았다. 수진을 생각하면, 내 나이가 된 내 또래의 이수진을 머릿속에 그렸다. 누군가와 결혼을 했을, 혹은 아이와 함께 걸어오는 그녀. 웃을 때 눈가에 주름이 지기 시작한, 수수한 얼굴로 이제 아줌마 다 됐지? 라며 수줍게 웃는 그녀.


나는 그런 그녀를 본 적이 없었다. 나 뿐 아니라 어느 누구라도 그랬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생각했다. 생을 이어온 그녀가 어떻게든 이 세상 속에 남아 살아가고 있다고 믿고 싶었다. 내가 행복하게 해주지 못했다는 황당한 표현을 진흙처럼 얇게 펼쳐놓고, 그녀를 오래도록 지켜보고 싶다는 마음이 가득했다.


수진이 없는 세상이 이미 존재하고, 그 세상이 그로부터 9년이나 흘렀다는 사실은 내겐 너무 가혹했다. 최훈은, 그녀를 생각할까? 나보다도 그녀를 더 생각해야할 건 그였다. 그는 아침에 일어났을 때부터 잠들 때까지 그녀를 생각해야했다. 물리적인 그녀가 없다면 정신적인 그녀를 불러내 이 세상에 남아있게 해야 할 가장 큰 책임이 있는 건 최훈이었다. 최훈이 아니라면 내가 해야 했다. 나는 정말이지 나쁜 놈이었다. 누군가 나를 욕해주면 좋겠다고, 나는 속으로 나를 욕했다.


그리고 다시 기억이 색을 입고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한 건 내 앞에 누군가가 나타나서였다.


"뭐해?"


평이한 말투로 이치호는 내게 물었다. 처음 만났을 때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반면 나는 수염이 드문드문 나고 있었고 머리도 제대로 빗지 않아 푸석푸석했다. 뻑뻑한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는데, 이치호의 눈에 비친 내가 보이는듯 했다. 다크써클이 한아름 내려온 초췌한 얼굴. 굳은 입매에 둥그스름한 뭔가를 올려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비웃지도 그냥 웃지도 찡그리지도 화를 내지도 못했다. 내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져있단 걸 그제야 알았다. 이치호는 딱히 놀란 얼굴이 아니고 그냥 평소 같은 얼굴로 내 앞에 앉아있었다. 대머리 주인장이 커피를 내왔고 그는 감사하다고 말했다. 대머리 주인장의 따스한 눈길이 내 머리 위로 쏟아졌다. 처음보는 것 같았지만 아니라고, 무의식 깊은 곳에서 말하고 있었다. 아 지금까지 그는 나를 저런 얼굴로 봤구나. 그래서 나를 뭐라고 하지 않은 거였어. 나는 고개를 들어 그에게 감사를 표현하고 싶었으나 그 역시 역부족이었다.


"이치호. 왜?"


내가 잠긴 목소리로 물었을 때 치호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주 오랜만에 말을 하는 기분이었다. 그는 교복차림이었다. 바깥은 한낮이었다.


"너, 학교는..?“

"어떤 아저씨가 여기 널브러져 있다는 소문을 듣고 안 올 수가 있어야지."


그는 갓 나온 커피를 호호 불더니 한 모금 마셨다. 맛있네. 그 말을 듣자 커피의 맛이 생각났다. 맛있지. 바로 몇 분전까지 나도 마신 커피였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가 말을 이었다.


"녹음기 그 뒤로 아직 안준거 알지?"


"아.." 나는 손을 꼼지락거렸다. 녹음기. 그런 것도 있었다. 하지만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이대로 여기에만 있을 거야?"


그가 내게 물었다. 나는 그런 말을 들을 줄 몰랐다는 사람처럼 눈알을 빠르게 굴렸다. 뭐가 어때서. 여기 커피는 저렴하고, 시간을 보내기도 좋다. 주인장은 나를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고, 나는 그녀를 생각하며 살아갈 수 있다. 그 이상 해야 될 뭔가를 알지 못하겠다.


"신윤주."


양 손가락을 꽉꽉 누르던 내 손동작이 멈췄다. 받아들일 시간을 주듯이 치호는 잠시 침묵했다.

내게 윤주가 있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단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이 세상엔 그 아이가 있었다. 작은 몸뚱아리를 받아들며 느꼈던 환희를 기억했다. 손가락 하나하나 발가락 하나하나에 손톱까지 빼곡히 자리 잡고 있다며, 까만 눈동자와 코끝에 달린 콧구멍과 입술 속에 빨간 혀까지 다 있다고.


아내와 같이 얘기하며 자지러지고 행복하게 웃던 내 모습이 기억났다. 거짓이 아니고, 조작된 게 아니고 현실이었다. 떠올리자면 눈시울부터 붉어질 끔찍하게 아름다운 기억이었다. 삶이 아무리 구렁텅이로 빠져도 나는, 그걸 기억했어야 했다. 이치호가 말해주기 전에.


“또 도망칠 거야?”


그 말에 눈 밑 광대뼈 부근의 근육이 움직였다. 속에서 뭔가가 울컥울컥 튀어나올 것 같았는데, 그것이 뭔지 알 수 없어 두렵고 막고 싶었다.


“이제야 내가 보이는가보네.”


건방진 말투가 귓가를 스쳤다. 일부러 도발하고 있는 거다. 그의 눈동자에 미미한 불안감이 스쳤다.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내가 싫은가보지. 왜..? 내가 대체 무슨 도움이 된다고.

이렇게 쥐고 흔들려 하는거야.


“넌.. 네가 원하면 뭐든 할 수 있잖아.”

“....”
“그런데도 내가 필요해?”

“필요해.”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치호가 말한다.


“난 미성년자잖아. 한계가 있다고.”


피식. 바람빠지는 웃음이 내 잇새로 새어나왔다. 그럴 리가. 이치호의 작업실을 본 내게 그런 말을 해도 우스웠다. 그에겐 장비와 정보가 있었다. 그에겐 내가 모르는 뭔가가.. 분명히 있었다.

치호도 제 말이 웃긴지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더 이상 말없는 내게 종이 한 장을 건넸다.

DM의 채용공고였다.


“부업 중 하나로 헤드헌터를 하고 있어. DM에 신창준이라는 사람을 꽂아 넣으려고 했는데 말이야..”


내가 쳐다보니 치호가 말을 이었다.


“이미 리스트에 있더라고.”


채용공고 뒤에 스카웃 명단이 있었다. 대략 20명 정도 되는 사람들 중 내 이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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