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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자루 Oct 29. 2024

To. 할머니께

나의 엄마의 엄마에게

할머니, 안녕하세요.

이번 기회로 할머니한테 편지를 쓰려는데,

살아오면서 한 번도 할머니께 편지를 써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왜 그랬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좀 더 살가운 손녀딸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운 마음은 점점 커져가는데,

실상 눈 닿는 곳에 할머니는 이제 안 계시네요.

너무 늦은 편지를 이제야 조심히 써봅니다.





저는 할머니와 친한 손녀는 아니었어요.

엄마가 말하길, 한 번도 할머니 손에 저희를 맡겨본 적이 없다고 했어요.

할머니가 엄마한테 '내가 어떻게 할까 봐 절대 안 맡긴다'라고 하셨다고ㅎㅎ


그건 아마 엄마의 꼼꼼한 성격 때문이었겠죠.

연년생인 저와 동생을 각각 앞뒤로 앉고 업은 채 '대학까지 나와 내가 왜 이렇게 사나' 울었어도

딸들을 봐달라고 부탁하지 않은 건 강인함 때문이었겠지요.

그래서였는지 몰라도 제게 조부모님은 조금 먼 존재였어요.


설이나 추석, 특별한 행사가 있는 날만 뵙고 인사하는 엄마의 엄마, 엄마의 아빠. 아빠의 엄마, 아빠의 아빠.

뭉퉁그려 큰 어른.

그 정도의 거리감으로요.




낯가림도 심했던지라 말을 많이 하지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할머니집에 갈 때도 매번 구석 안방에서 동생과 놀곤 했었어요.

할머니 방에는 자개로 이루어진 문 그리고 거울이 붙은 장롱이 있었지요.

그리고 장롱 옆에는 전기장판이 놓인 작은 요자리가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겨울에는 그곳에 들어가면 따뜻했어요. 한쪽에 붙은 거울 앞에서 동생과 놀았고, 방 한편에 붙어있던 할아버지의 사진을 쳐다보곤 했어요.


어느 날부터 할머니 사진도 있었어요.


초록색 배경에 한복을 입고, 정면을 바라본 채 찍은 할머니의 사진.

그것이 나중에 장례식장에 쓸 영정사진이란 걸 개념적으로 알기 전에도, 후에도. 그 사진은 언제나 그 자리에 한참이나 놓여 있었어요.


죽음을 약속하고 찍는 사진은 어떤 것일까, 생각해 본 적이 있어요.

죽음을 긍정하는 것 같아서 그런 사진은 찍고 싶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생의 어떤 시기를 지나면, 언젠가 한 번 그런 사진을 찍어야 되겠죠?

생각하면 슬퍼집니다.


할머니는 언제, 어느 시점에 그런 생각을 하고 사진을 찍으셨나요.

왜 그때 물어볼 생각을 못하고, 지금에서야 생각하는 걸까요.

궁금해집니다.





제 꿈에 대해서 말한 적이 없었죠?

그것도 너무 아쉽습니다.

어릴 때는 과학자가 되겠다고, 의사가 되겠다고, 서울대에 가겠다고, 성공한 사람이 되겠다고.

말할 수 있는 온갖 허세를 부린 것 같은데.

저는 자라나며 현실에 순응하는 사람이 되어버렸으니까요.


그리고 결국 하고 싶었던 한 가지는 글을 쓰는 것뿐이었는데.

그때는 이미 대학도 졸업하고 이미 취직까지 한 상태였어요.


누군가 제 꿈을 비웃기라도 한다면,

그런 의도가 아니어도 그저 귀엽다 여기며 넘긴다면,

여린 제 마음은 문을 꼭 닫을 것만 같았어요.

그래서 결과를 보여주기 전에는 말하지 말자. 했습니다.


제가 글을 쓴다는 것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물며 첫 소설을 완성한 뒤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엄마에게 보여준 게 저의 꿈을 선명하게 알린 처음 순간이었으니까요.


정말로 작가가 되면 자랑하고 싶었어요.

대학에 들어갈 때도 은행에 들어갔을 때도 자랑스러워해 주셨지만,

제가 쓴 글을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제가 보는 세상은 이런 것이에요.'

'저는 이런 생각을 글로 표현하고 싶었어요.'


라고 말이에요.


하지만 할머니, 할아버지 모두 제가 첫 계약을 하기 전 떠나셨습니다.


아. 기다림을 기약하는 건 상호 간에 시간이 맞아야 하는구나.

그때 깨달았어요.


천년만년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것을요.





그런 장면이 기억납니다.


엄마가 늦은 밤 퇴근하던 때.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이던 저를 붙잡고 할머니가 하시던 말씀.


"느이 엄마 밤에 무서우니까 꼭 마중 나가라."


그 말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어요.

엄마는 밤이 늦었으니 항상 집에서 나오지 말라고 하셨거든요.

그전까지는 걱정을 받고, 보호받아야 하는 건 언제나 딸인 저. 미성년자인 저였으니까요.


하지만 할머니의 눈에는 딸이 무서워할 테니 손녀보고 마중 나가라고 하는 그 말이요.


그 말이 너무 큰 사랑으로 느껴졌어요.


사랑한다는 말보다, 걱정된다는 말보다 더 사랑처럼 보였어요.


아. 우리 엄마한테 내가 소중한 것처럼 할머니한테도 엄마가 너무 소중하구나.

저는 그저 알겠다고, 꼭 그러겠다고 고개를 끄덕였어요.

그제야 할머니는 안심한 듯 웃으셨어요.


또 하나. 어느 순간 다리에 힘이 없어서 차에서 내릴 때 붙잡던 할머니의 손길.

할머니는 저보다 작고 연약해 보였는데도,

그냥 별생각 없이 잡아드린 팔이 떨어질 만큼 무거웠다는 것.

온 체중을 실어서 내게 의지하는 어떤 존재의 무게가 피부로 와닿았던 기억.

그게 싫거나 거북하기보다는 놀라웠던 기억이 납니다.

아직 저는 그 무게감이 어떤 걸 의미하는지 모르겠어요. 왜 기억에 남는지도요.



또 하나. 이건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입니다.


제가 취직하고 나서 발 넓은 할아버지는 만나는 사람마다 우리 손녀가 은행에 취직했다고 말하고 다니셨다고 들었어요.

항상 제가 할머니댁에 가면 할머니, 할아버지는

"회사 잘 다니고 있냐" 하시며 물어보시는 게 다였거든요.

근데 그렇게 자랑하고 다니신다는 게 신기했습니다. 뿌듯하기도 했고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먼 존재이긴 해도, 저를 아끼는 마음은 와닿았습니다.


어릴 적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면 엄마나 아빠처럼 가까운 조부모님이 되셨을지도 몰라요.

그래서 작가가 된 저를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쓰다 보니 또 아쉬워집니다.





할머니, 그곳에선 잘 지내고 계신가요?

할머니가 떠나셨을 때 엄마가 많이 울었어요.

해드리지 못한 게 너무 많다고 매일매일 울었습니다.


아무리 위로를 해도, 곁에 있어도

할머니를 대신할 수는 없었어요.

그런 게 있더라고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옆에 있어드리는 것뿐이었습니다.


인생에서 사람이 하나 사라진다는 것은 너무 큰 일입니다.


솔직히 말하면요 할머니.

저는 할머니가 떠나셔서 슬픈 것보다 엄마가 너무 슬퍼해서 슬펐어요.

할머니가 '느이 엄마 잘 챙겨라'하는 그 마음처럼요.

그래서 할머니가 더 오래 저희 곁에 계셨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자주 했습니다.


근처에 살아서 좀 더 자주 보고,

문득 어느 평일날 저녁도 같이 먹고,

특별한 일 없어도 같이 놀러도 가고.

그랬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취직하고 적응하기까지도 바빠서 그런 생각을 너무 늦게 했어요.


제가 돈을 버니까 한 번쯤 모시고 가자고 말해볼걸... 그래서 다 같이 찍은 추억사진이라도 많이 남길걸..


... 너무 늦었네요.


그래서 행복할 때마다 엄마가 가끔 슬퍼해요.


좋은 거 보고, 맛있는 거 먹고, 못생겨서 싫다고 우겨도 결국 나중엔 추억이 되는 사진을 찍고 나면요.


문득 저처럼 할머니에게 하지 못해서 너무 후회가 된다고.

여전히 할머니의 부재를 제가 대신할 순 없습니다.

아마 영원히 그러겠지요.





어떤 말로 마무리 지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때 지난 편지를 쓰지 말았어야 했을까요.

닿지 못할 편지라는 게 이토록 사무칠 줄 몰랐어요.

쓰고 나니 수신인이 비어버려서.

그만큼 쓸쓸한 마음이네요.


그래도 한 가지 말씀드릴게요.

할머니 딸은 걱정 마세요.

제가 잘하겠습니다.


겁 많은 엄마 무섭지 않도록 해줄 거고.

더 좋은 거 많이 보여드리고

추억도 많이 만들게요.


뭘 해도 부족하겠지만

부족해도 부족해도 계속할게요.


할머니한테 못한 마음, 할머니 딸에게 쏟아부을게요. 걱정 마시길.


그리고 살아계신 동안 더 가까워지지 못해서 죄송해요.

할머니를 오래도록 기억하겠습니다.


저는 영혼이 있다고 믿거든요.

그러니 언젠가, 이 편지가 닿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저의 이기적인 희망사항이지만 그렇게 생각해 버릴래요 ㅎㅎ


할머니 그곳에선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서툰 손녀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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