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아이와 어른의 시간은 다릅니다

by 은자루

[속보]

[국내 10대 제약회사인 '도명제약' 내부에서 새로운 약물 실험이라는 명목으로 일반인에게 최근 2년간 약물투입을 진행한 내용이 드러났습니다. '도명제약'은 대상자들 모두에게 사전 동의를 받았으며, 해당 약물은 인체에 안전한 형태로 문제없이 투약을 진행했다 주장했습니다. 대상자로 확인된 약 300명의 사람들은 90% 이상이 유전병이나 원인불명의 질병을 앓고 있었고, 대다수가 사회적 취약계층 그리고 기초생활수급자로 확인되었습니다. 대상자 모두 부작용에 대한 인지는 확인받았으나 그보다는 병에 대한 치료가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희망, 높은 수당 등으로 인해 '도명제약'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으로 확인됩니다. 담당부서에 있던 최 모 씨 이 모 씨 신 모 씨 등은 검찰에 협조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이들이 자발적으로 찾아간 것이 아닌, 제안을 수락할만한 대상자를 타깃으로 투약을 이어간 것으로 인해 이것이 생체실험이 아니냐는 논란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다음 소식입니다..]


싸한 느낌이 들었다.

바깥에 내린 비로 눅눅한 실내. 나는 창밖을 등지고 있었고, 내 뒤로 비냄새를 묻힌 누군가가 들어왔다.

잘 닦인 검은 구두의 소리.

빗물에도 미끄러지지 않고, 오히려 털어내듯 깔끔한 울림. 실내가 비어있어서 그런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나는 삐끄덕거리는 고개를 겨우 돌렸다. 제대로 쳐다보지 말아야지. 싸한 감각은 이내 맹신처럼 나를 옭아맸다. 하지만 마음과 달리 돌아선 순간 상대방과 눈이 마주쳤다.

옛 도명에서 만난 악연. 최훈이 나를 보고 웃었다.

이 악연을 설명하자면, 아주 먼 옛날로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나는 그보다 몇 주전, 그 애가 나를 찾아왔을 때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다.



**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퇴근길이었다. 회사를 등지고 걸어가는 작은 골목 입구에서 나는 그를 발견했다.

해가 길어져 이제 막 어둑해지기 시작하는 하늘이 그의 등 뒤로 펼쳐졌다. 구름이 뭉게뭉게

솟아오른 와중에 하늘이 빨개지고 있었다. 서 있는 남자는 풍경에 녹아들어 어쩐지 그림 같았다.

역광 때문인지 서 있는 남자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별 감흥 없이 지나가던 나는 잠시 멈춰 섰다.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돌아섰다. 여전히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나를 보는 것 같다는 느낌은 나를 본다는 확신으로 바뀌었다.


"저기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나를 향해 한 발짝 내디뎠다.

꿀꺽. 나도 모르게 침을 삼키느라 목울대가 크게 울렁였다.

그늘이 사라진 그 얼굴을 보고 나는 살짝 안도했다. 어둠이 주던 위압감이 사라졌다.

고등학생? 심지어 교복을 입고 있었다. 단정한 남색 재킷에 마찬가지로 같은 색의 넥타이. 다리가 길어서 그런지 교복이 안정감 있게 잘 어울렸다. 키는 나와 엇비슷하거나 조금 컸지만 역시 아까와 같은 위압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눈이 큰 타입

이었는데, 눈매 자체는 날카로웠다. 주변에 저런 눈매를 가진 사람이 있는지 생각하고 있었다. 내 눈앞에 있는 남학생을 그렇게 품평하는 동안에도 그는 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혹시 누구 찾아왔어요?"

"...."


대답은 하지 않고 그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는데, 그 순간 내가 발견하기 전부터 그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기 시작했다.

근거 따윈 없었다. 말없이 주시하듯 질긴 시선에 기분이 이상해져 자리를 뜨려는 찰나,


"신창준 씨."


그가 나를 불렀다.

그 말투에 압도당하는 바람에 나는 어설프게 네, 네?라고 대답하고 말았다. 피하던 시선이 다시 맞물렸다. 보통 누군가와 말을 하거나 이야기한다 하더라도 거리감이랄까 그런 게 있지 않나? 이 꼬맹이가 심각하게 불편한 이유가 단 한 번도 내게서 눈을 돌리거나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는 데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신, 이수진 선생님 알지?"


그는 나보고 잘 알아들으라는 듯, 한 글자 한 글자에 힘을 주면서 말했다.

그 이름이 내 뇌리를 통과해 기억으로 재구성되기 전에 나는 그 강렬한 눈빛에 누군가를 떠

올렸다. 대체 어디서 그 이름을?

나도 모르게 그의 멱살을 잡고 말았다. 하얀 교복셔츠가 심하게 구겨졌다. 하지만 남학생은 잠시 인상을 찌푸렸을 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두고 온 그녀의 발걸음이 뒤늦게 짙은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무게를 드리웠다. 세상이 나를 비난하는 것 같은 착각에 소름이 끼쳤다. 9년 전처럼. 나는 생경한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이수진, 아냐고 물었어."


그것이 나와 그의 첫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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