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 사이언티스트, 퇴사를 앞두고
나는 데이터 사이언티스트다. 이번 달까지 한 스타트업의 AI 개발 총괄을 맡고 있었고, 곧 퇴사를 앞두고 있다. 퇴사를 준비하는 기간 동안 정체성에 대해 고민이 많았다. 사실, 이건 나에게 꽤 오랜 고민이다.
모든 선택이 그렇듯 내 전공, 첫 직업도 한낱 좁은 시야로부터 발견되었을 뿐이다. 원대한 이상과 완벽한 노선을 따라 춤추듯 걸어왔다면 어땠을까. 역시, 그 마저도 뒤돌아보면 꼬인 길이겠지.
꼬일 대로 꼬였다고 생각했다. 점과 점이 만나 결국은 이어진다지만 도무지 이어질 수 없는 점처럼 보였다. 야속하게도 그 점 하나 찍자고 쥐어짜듯 고생했던 기억들로 가득하다. 나는 계획형 인간이다. 아니, 계획형 인간이라 믿어왔던 것 같다. 돌아보면 단 하나의 계획도 완벽하게 지킨 적이 없으니.
우연히 하루가 완벽했다는 느낌이 들다가도 꼭 하나씩 어긋남이 있었다. 또, 그것을 알면서도 항상 기로에 서서 어떻게든 최선의 선택을 해보겠다고 고민의 사슬에 서너 시간, 일주일, 한 달을 갇혀있곤 했다.
'고민할 시간에 행동하라'
인생 전체 통틀어 스스로 가장 많이 새겼던 말이다. 그만큼 나에게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지금의 경험, 지금의 시야로는 결코 볼 수 없는 앞날을 두고 그렇게 재고 따졌다. 지금의 선택이 두 번 다시없을 최선의 기회와 선택일 확률은 벼락 맞을 확률보다 낮다고 되뇌어도 매번 결정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중 특히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마치 100KG짜리 모래주머니처럼 온 힘을 다해 발목을 붙잡고 도통 놔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떼어낼 방법을 모르다 보니 그냥 질질 끌고 여기까지 왔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내 커리어의 종점은 어디인가? 지금 내가 하는 이 일이 나에게 가치가 있는가? 모르겠다. 정말 어려운 고민이다. 첫째, 나 스스로의 경험이 적기 때문이고 둘째, 나를 둘러싼 미래를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건 지금 당장 풀 수 없는 문제며 앞으로 평생에 걸쳐 매달리겠지만 결국 풀지 못할 수도 있는 숙제다.
'그럼 쓸데없는 고민 말고 일단 마음 가는 대로 해봐'
이 말이야 말로 아주 제대로 쓸데없는 조언이 되겠다. 다만, 고민만 해서도 역시 답이 없으니 우리는 매 선택의 순간에 확률적 우위를 가지도록 노력해야 하고, 고민의 질을 높이려 애쎠야 한다.
'확률적 우위'
내가 인간적으로 좋아하는 월가아재라는 금융 데이터 사이언티스트가 입이 닳도록 하는 말이다. 투자뿐만 아니라 인생에 있어서 새겨야 할 단 하나의 문장이자 방법론이 있다면, 스스로의 확률적 우위를 조금씩 높여가는 것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중 하나가 확률론적 사고다. 세상은 모 아니면 도로 움직이지 않는다. 지정학과 정치 이해관계, 미거시 경제, 기업과 인간의 감정적 의사결정 등이 복잡하게 유기적으로 얽혀 시시각각 사건사고의 확률이 변화한다. 선형 회귀로는 터무니없고, 수백 개 층의 딥러닝 신경망으로도 풀기 어려운 것이 바로 인간의 의사결정이다.
의사결정은 결코 단 하나의 해로 머물지 않으며, 오직 확률적 우위만 존재할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이 더 확률적으로 나은 선택인가? 에 대한 결정을 해야 하는 것이고, 그러한 확률적 우위를 높여야만 복리의 개념으로 삶이 나아진다. 만약, 53% 확률로 더 나은 선택이라면 내가 원하지 않은 미래를 마주할 확률이 47%다. 따라서 '더 나은 선택의 확률을 높이는 것'이 미래를 알지 못하는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지금의 경험과 식견으로는 내가 도달해야 할 목표, 미래가 뚜렷할 수 없다. 미래를 알지는 못하지만 확률적 우위를 조금씩 높이기 위해 책을 읽고, 기술을 배우고, 경험을 쌓다 보면 어느새 나를 둘러싼 오늘이 꽤 괜찮은 현실이 되어 있을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