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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한 책임감

청소년 교육 (중등교육 전문가)

by 서상원

최근 몇 편의 기고글에서 기업교육 중심으로 글을 쓰다 보니, 오늘은 필자의 교육업 출발점인 청소년 교육에 대한 기고글을 한번 써 보려고 한다.

보통 학계에서 1세대(1 Generation)하면 20년을 말한다. 현실적으론 30년 이상이다.


자! 그러면 어찌 30년의 세월이 있는데 부모자식 간 대화가 원활하다고 보느냐가 필자 주장의 핵심이다. 당연 불통이고 답답한 것이 현실이라고 보면 된다.


그래서 필자와 같은 중등교육 전문가가 있지 않겠는가?


아래 필자가 몇 년 전 2가지의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초등학교 3학년 딸이 고단한 엄마를 돕겠다며 설거지를 하다가 접시 하나를 깨뜨렸다. 만일 이 일이 우리 각자의 가정에서 일어났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자신의 가정을 한 번 돌아보자. 잘 못하는 설거지지만 자원해서 엄마를 돕겠다는 딸을 대견스러워했을까? 혼날까 봐 질려 있는 딸이 안쓰러워 딸을 끌어안으며 등이라도 두드려줬을까? '자신 없으면 가만히나 있지 괜히 나서서 비싼 그릇을 깨뜨린다'며 나무라지는 않았을까?


필자의 내담자인 한 대학원생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여섯 살 때인가, 아버지의 칭찬을 단 한 번만이라도 받아보고 싶은 심정에 마당과 대문 앞 골목에 소복이 쌓인 눈을 치우고 또 치웠다. 그런데 아버지로부터 돌아온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버지는 "눈을 치웠으면 치웠지, 왜 빗자루는 부러뜨리느냐"며 어린 아들을 심하게 나무랐다.


자신이 초래한 부정적인 결과에 대해서 비난을 당하거나 책임을 추궁당하며 살아온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책임감이 강한 사람으로 성장하게 된다. 자신에게 돌아올 책임을 면하기 위해 어떠한 부정적인 결과도 예방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자신이 직접적으로 잘못한 일에 대해서만 혼나면 그래도 낫다. 자신에게 잘못이 일부 있다 해도 남의 잘못이 더 큰 일에 대해서까지 혼나면서 성장한다면, 이 사람의 책임감은 더욱더 강해지게 된다. 부모의 출타 중에 동생을 보살피다가, 동생이 다치면 마치 자신에게 전적인 책임이 있는 것처럼 어쩔 줄 몰라하는 맏이의 심정을 생각해 보자. 동생의 부상이 천방지축으로 까부는 동생 자신의 책임일 수도 있고, 아이들만 집에 두고 외출한 부모의 책임일 수도 있으며, 피치 못했던 일이라서 어느 누구도 책임질 필요가 없는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맏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야단은 자기 혼자 다 맞고 나면,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이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된다. 책임감은 이런 식으로 자신의 영역 너머로까지 확장된다.


'종례가 끝나면 다 남아서 학급 청소를 하고 가라'는 담임 선생님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다른 친구들은 다 도망가고 없는데 자기 혼자 남아서 마지못해 화장실 청소까지 하고 있는 초등학생의 심정도 마찬가지다. 책임감이 과도한 경우 그 사람이 지는 인생의 짐은 너무 무겁다. '공동책임은 무책임'이라는데, 그 사람에게는 '공동책임은 다 내 책임'인 것처럼 생각된다.


책임감이 과도한 사람일수록 오히려 변명이나 핑계가 많을 수 있다고 표현한다면, 이는 결코 역설만은 아니다. 책임감이 너무 무거운 나머지, 그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덮어쓰면 죄책감으로 무너질 것 같아서, 극구 자신의 책임을 면하려 하는 것이다. 아이가 감기에 걸렸는데, 아이 엄마는 극구 "나는 아이를 바깥에 내보낸 적이 없다"라고 항변한다. 어느 누구도 아이의 감기가 엄마의 보살핌 소홀 때문이라고 비난한 적도 없는데 말이다. 스스로 자신의 탓일지도 모른다며 자책한 나머지, 자신은 책임이 없다고 항변하는 것이다.


책임감이 과도한 사람은 혼나는 것이나 비난당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대지처럼 만물을 푸근히 품어 안는 모성이 부족한 사회에서는 준엄한 하늘의 심판만이 한 사람의 잘못을 기다리고 있다. 반드시 책임 소재를 따지는 사회, 누군가가 꼭 책임을 져야 하는 사회에서는 책임을 가리기 위한 비난과 맞비난의 공방이 서슬 퍼렇게 진행된다. 누가 접시를 깼는가, 누가 빗자루를 부러뜨렸는가, 누구의 소홀함 때문에 동생 다리가 삐었는가, 누가 화장실 슬리퍼에 물을 적셨는가?


어느 책의 제목처럼 '사소한 것에 목숨 거는' 일이 벌어진다.


책임감은 잘못을 엄히 다스리는 사회에서 자라난다. 그러나 잘못에 비해 징계가 너무 가혹할 경우에는 잘못을 해 놓고도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기가 어려워진다. 잘못을 인정했을 때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잘못을 엄정하게 다스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 잘못을 따뜻하게 감싸는 분위기에서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성숙한 책임감이 자라난다.


과도한 책임감에서 벗어나 성숙한 책임감을 지니기 위해서 먼저 자기를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 잘못할 수도 있고 실수할 수도 있는 연약한 자신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자. 실수한 자신을 비난하기보다 푸근하게 용서하자. 이러한 사람은 비난을 기꺼이 감수할 수 있기에 굳이 자신의 책임이 아닌 일에 대해서도 '내 탓이요'라고 말할 수 있다. 아빠가 묻는다. "누가 슬리퍼에 물을 적셨지?" 동생의 잘못인 줄 아는 형이 이렇게 대답한다. "아빠, 제가 그랬나 봐요. 제가 빨리 닦아 드릴게요." 과도한 책임감을 지닌 사람은 비난을 두려워하지만, 성숙한 책임감을 지닌 사람은 비난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뿐 아니라 타인의 잘못까지도 대신 짊어진다.


대체로 자애로운 모성이 결핍된 부성은 과도한 책임감을 키우고, 엄한 부성이 결핍된 모성은 무책임을 키우지만, 부성과 모성이 겸비된 사회에서는 성숙한 책임감이 자라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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