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위해 기도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심지어 중학생 무렵인가 갔던 집회에선 인도자가 찬송을 부르다 말고 나라를 위해 부르자며 '애국가'를 목청껏 제창했던 일도 있었다. 물론 개신교도들에게 이 나라를 보우하는 분은 '하느님'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거룩함과 애국심을 동시에 느낀다.
교인들에게 나라는 항상 위기였다. 그게 한 1995년에도 그랬고, 2005년에도 그랬고, 2015년에도 물론 그랬다. 2025년에도 교인들은 저마다 불처럼 타오르는 애국자들이다. 교인들은 나라를 사랑한다고 한다.
내가 흥미롭게 느낀 지점은, 이 개신교가 한반도에 들어와 성공적으로 자리잡은 종교 중 가장 막내라는 것이었다. 가장 늦게 들어왔고 가장 외래종의 색채를 많이 간직하고 있었다. 가톨릭 마저도 국내에 성지를 여러 곳 두고 있고 예컨대 절두산 성지만 해도 1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가. 개신교는 그런 가톨릭보다도 후발주자다.
심지어 개신교는 전통문화를 내세우는 사람들과 매번 마찰을 일으켰다. 한번은 교회 행사 차 방문한 다른 교회에서 '장승을 뽑으며 행복해 하는 전도사님들'의 사진을 자랑스럽게 게시판에 붙여놓은 광경을 본적이 있다. 엄연히 전통 문화재인 장승을 뽑는다는 행위와 행복하게 웃는다는 표현이 동시에 배치되어 있으니 머리가 저마다의 방향으로 기묘하게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고등학생 때 증산도를 믿던 전통윤리 선생님이 스스로 개신교 신자라고 밝힌 학생 하나를 붙잡고 난데없이 기독교를 흠집내기 시작하던 모습도 기억에 남는다. 서양 종교인 기독교는 고작해야 하나의 지옥만 갖고 있는 저차원의 종교지만, 동양의 불교는 지옥을 수십 개나 설정해두고 있다는 것이다. 지옥에 대한 관념을 수십개나 더 갖고 있는 게 어째서 대단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기독교, 좀더 구체적으로 개신교에 대한 전통윤리 애호가들의 적개심은 대단하다. 사실 기독교든 불교든 모두 한반도 한민족에겐 외래 종교일 뿐이지만 말이다.
우리 가족 역시도 제사 문제로 친척들과 꽤 불편한 문제가 생기곤 했다. 엄마가 마침내 '제사의 뜻에 동참하는 의미가 아닌 한 조심스럽게 먹어도 괜찮다'고 선언하기 전까지 우리 가족은 친척들이 제사지낸 음식을 먹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친척들 입장에선 까탈 부린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게 우리에겐 정결함을 지키는 일이었다.
이렇게 개신교는 전통윤리에 대한 반감을 갖고 있지만, 그럼에도 남다른 애국심을 강조한다. 그러나 조선시대까지의 전반적인 역사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다. 그땐 기독교가 없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개신교의 애국심은 전통과 민족에 대한 애착의 정서와 구분되는, '대한민국'이라는 현대국가에 대한 애착의 정서와 더 가깝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런 유형의 애국심 마저도 일반적인 국민들의 정서와 많이 구분되는데 개신교의 경우 '고난사관'과 '피착취민족에 대한 타력구원 서사'를 중심으로 흘러간다. 이는 한국의 역사와 이스라엘 유대민족의 역사를 동치시켜서 성경을 독해하면 어느 정도 매끄럽게 이해되기 때문일 것이다.
개신교 목회자들의 설교를 듣다보면 우리 역사의 고난과 질곡에 대해 거의 자학에 가까울 정도로 강조하는 경우를 왕왕 보게 된다. 우리는 수천년동안 박해만 받아온 세계에서 가장 불행한 민족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 땅에 내린 일종의 형벌 내지 숙명에 가까운 것으로 이해된다.
이런 시각에 따르면 예컨대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 보였던 의외의 선진적인 면모나 강성했던 면모에 주목할 여지가 없어진다. 그런 면모는 없는 걸로 해야 한다. 우리는 가장 못났고 가장 약한 걸로 되어 있어야 한다. 굳이 이렇게까지 자학적으로 우리 역사를 돌아보는 이유는, 그렇게 해야만 그 다음에 오는 신념, 즉 피착취민족에 대한 타력구원 서사의 신념이 그만큼 더 강렬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세계에서 가장 못난 민족에게 이토록 거대하고 아름다운 축복의 선물을 준비하셨다는 것이다.
다수의 개신교도들은 우리 스스로가 가진 내재적 힘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우린 연약하고 힘이 없어서 우리 스스로의 노력만으론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일종의 역사적 필연은 믿을 수 있다. 외재적 힘이 나타나 우리를 구원해주고, 우리를 강성한 성채 안에 거하도록 지켜줄 수 있다. 그게 현실 외교적 관점에서는 '기독교 국가'인 미국이고, 좀 더 종교적인 관점에선 하나님이다.
그러나 수동적으로 앉아서 기다리기만 해선 안 된다. 이 땅의 '빛과 소금'인 개신교 신자들은 누구보다 더 열성적으로 나라를 위해 애써야 한다. 기도를 하고 전도도 하고 세상을 향해 외쳐야 한다. 우리가 이 땅의 소금으로서 역할을 다하지 않으면 이 땅은 썩어서 사라지고 만다는 일종의 종말론적 공포심이 있다.
고백하건대 중고등학생 시절 내가 이런 신념을 갖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내 경우엔 사실 기독교에 대한 신앙심, 그리스도에 대한 열망만으론 신앙생활을 유지하기에 충분하지 않았던 것 같다. 무언가 하나쯤 더 필요했고 그게 애국심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종교적 신실함에 애국심이 더해지면서 어마어마한 사명감이 발생하게 된다. 나는 하나님을 위해 이 나라의 영광을 지키고자 싸우는 투사가 된다. 그건 영혼에도 사명을 부여하고, 신체에도 사명을 부여해준다.
그러나 신앙심과 애국심이라는 두 개의 바퀴는 불이 타오르는 전차의 바퀴와도 같았다. 어딘가 잘못된 길로 가는 것 같은데 그래도 달려야만 하는 것이다. 내 경우는 두 개의 바퀴가 동시에 구를 때는 모든 게 내면에 통합되어 원활하게 잘 작동했던 것 같다. 그러나 신앙심이 먼저 제 궤도를 이탈하게 되면서 전부 다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만일 애국심을 위한 장작으로서 그리스도를 이용하는 것일 뿐이라면, 나는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런 생각이 들자 그제야 내가 애국심조차도 아주 강하지는 않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2015년 기점으로 헬조선 담론이 유행하게 되었고, 그 이후론 민족감정마저도 침착한 상태가 되고 만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 시절의 내가 좀 우습기도 하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대한민국의 부흥을 꿈꾸다니. 그걸 사명으로 삼고 그렇게 불타올랐다니. 마치 무언가에 씌인 것 같다.
한편으론 가끔은 그 시절이 그리워질 때가 온다. 그 이후로 무언가가 그만큼 가슴을 뜨겁게 달구었던 적이 없었으니까. 그 감정은 너무 강렬해서, 그 빛이 꺼졌을 땐 꽤 오랜 시간 차갑게 식어버린 내면에 갇혀서 어디로도 탈출하지 못할 것 같은 비관에 빠지게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태극기와 십자가를 동시에 들고 광장에서 울부짖는다. 그 사람들 내면에 타오르는 불은 누가 꺼버릴 수도 없고 그들 스스로도 침착하게 소화시킬 수도 없는 상황이다. 아마 사람에 따라 그 불길이 잦아드는 순간이 오는 경우가 생길 것이다. 내 생각엔 그들의 내면에 그 이후 차갑고 공허한 공황의 순간이 닥칠 때 잘 다독여 줄 준비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