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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EMPRE May 04. 2021

[서평] 공포에 맞서는 기묘한 방식

<<슬픈 불멸주의자>>와 <<러브크래프트; 세상에 맞서 삶에 맞서>>


 무엇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가. 다양한 답이 있겠지만, 인간은 유독 자기 죽음이 필연적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동물들과 구분된다고도 할 수 있겠다. 어쩌면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근원적인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계속해서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야말로 진정으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일 수 있다.     


 죽음에의 공포는 문화 속에서 여러 형태로 변양되어 은밀하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코스믹 호러’라는 장르가 있는데, 이는 인간의 인식능력으로는 도저히 담아낼 수도 없이 거대하고 광막한 존재 앞에서 느끼는 좌절감과 두려움을 그려내는 장르라고 알려져 있다. 그만큼 왜소한 자아의 무력함과 연약함이 강조된다. 장르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하워드 필립 러브크래프트 역시 그런 왜소하고 무력한 자아를 가진 사람이었다.     

 

 흥미롭게도 러브크래프트의 전기를 집필한 미셸 우엘벡은, 그러한 공포가 러브크래프트의 깊은 인종차별적 사고와 근원적으로 엮여 있다고 이야기한다. 흔히 생각하는 인종주의는 왜소함보다는 우월감을 표출로 그려지기에, 잘 와닿는 이야기는 아니다. 죽음, 공포, 인종주의. 이들은 도대체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     


 개인적인 감상으론, 사회심리학 저서 『슬픈 불멸주의자』에서 러브크래프트의 삶과 저술에 담긴 그 복잡한 무언가가 잘 풀이되고 있다고 느꼈다. 아마 우엘벡의 러브크래프트 전기 『세상에 맞서 삶에 맞서』와 『슬픈 불멸주의자』를 함께 읽으면 꽤 흥미로운 연결고리를 많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 죽음과 두 가지 불멸의 길

 『슬픈 불멸주의자』의 저자들은 죽음에 대한 인식이 인간 진화사 초기에 자의식이 급성장할 때 부산물로 생겨난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스스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되새겨볼 수 있게 되면서, 자신의 필연적인 죽음마저 자각할 수 있게 되었다. 죽음을 직시하게 되면서, 우리는 뭇 동물 중에서도 유독 고통과 괴로움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절망은 너무나 지독한 것이어서, 역사 초기부터 그러한 공포와 절망을 다스리는 방법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한 가지 방법은 늙고 병들어서 죽을 수밖에 없는 육체와 별개로 자아를 담지하고 있는 또 하나의 개념을 창조하는 것이다.     


 즉, 불멸하는 영혼의 개념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둘러싼 종교적 신념 체계를 만들어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종교를 통해 죽음에 대한 공포와 절망을 다스릴 수 있다. 이러한 신념을 ‘실제 불멸성(literal immortality)’이라 부른다.     


 두 번째 방법은 ‘상징적 불멸성(symbolic immortality)’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즉, 역사와 문화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 족적을 남기는 것, 그럼으로써 상징적으로나마 기록되어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은 명성을 남기고, 부를 과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인간은 죽을 운명임이 아주 살짝만 암시돼도 자신이 살았던 흔적을 세상에 남기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싸운다.

    

 더 나아가 『슬픈 불멸주의자』의 저자들은 사람들이 필연적인 죽음을 직시하게 되면, 자신이 속한 문화에 더 애착을 갖고, 그 문화에서 바라는 역할기대를 수용하는 방식으로 공포를 다스리려 한다고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문화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다. 문화에 참여함으로써 스스로를 공통된 배경, 세계관, 미래 운명으로 맺어진 안정적이고 영속적인 공동체의 일부로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적 사물 체계 속에서 우리는 그 역할과 가치를 받아들이고, 자신이 세계에 참여하는 소중한 존재 느낌을 향유할 수 있다. 이러한 느낌은 우리가 갖고 있는 가장 극심한 공포, 즉 죽음의 공포를 다스린다.  

   

 오늘날 전통적인 종교와 공동체의 문화 모두 현대사회의 도전에 심대한 타격을 입고 말았다. 이제 이들은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균열을 안고 힘겹고 위태롭게 불멸성의 약속을 재생산하고 있다. 관례, 전통, 영적 믿음을 따르는 전통의 상실.     


 러브크래프트 역시 그런 시대에 그런 삶을 살았다. 우엘벡에 따르면 러브크래프트는 청교도적 전통 윤리가 부여하는 삶의 한계와 역할에 막연한 그리움을 가졌지만, 그렇다고 종교로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고 한다. 균열이 일어난 문화적 사물 체계를 무력하게 바라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는 것이다.     


2) 부(富)와 성(性)

 우엘벡은,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에서 유독 중요한 두 가지가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바로 물질적 부(富)와 육체적 성(性)이다. 놀라울 것도 없이 두 가지는 모두 불멸성에 대해 양가적인 의미를 품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러브크래프트는 복잡한 감정을 자아내는 두 가지를 구태여 부각하지 않았다.


 『슬픈 불멸주의자』에서는 부의 추구, 부의 과시가 죽음에 대한 공포를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설명한다. 아마 자신이 축적한 부를 과시하고,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면 일종의 상징적 불멸성을 획득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을지 모른다. 명품과 화려한 파티가 그렇다. 그렇지만 이는 러브크래프트처럼 재산을 모아 과시하는 데 재능이 없는 이들의 삶과는 동떨어진 이야기다.     


 경제적 부는 무엇보다 물질적이고 추상적이다. 자연 사물에 밀착된 내밀한 의미, 인간관계의 숙명적 의미를 추상화시키고, 거래와 교환을 위한 1차원적인 가치로 모든 것을 환원시켜 버린다. 복잡다단한 층위를 가진 옛 문화와 가치는 이제 파편화되고, 질서 지어진 문화가 규정해주던 개인의 가치와 잠재적 기여의 기회를 무너뜨린다. 그리하여 죽음을 가려주는 차단막을 훼손하고, 운명을 직시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성(性) 역시 양가적으로 불편한 감정을 안긴다. 성관계는 유전적인 불멸성을 약속한다. 그렇지만 성은 다른 면에서 우리의 육체와 동물성을 직시하게 만든다. 우리는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는, 노쇠해가는 육체를 가진 존재이다. 육체적 존재는 덧없는 존재이며, 성관계는 우리가 죽음의 공포를 저지하기 위해 고안한 상징적 정체성을 손상시킨다.     


 러브크래프트가 그려내는 공포스러운 존재는 흥미롭게도 생물학적 연구의 기술(記述)을 차용한 방식으로 묘사된다. 무엇보다 물질적인 신체적 특징을 세밀하게 묘사함으로써, 어딘지 모를 낯선 공포와 혐오감을 끌어내는 것이다.      


 하나 더 중요한 기제는 ‘시간’이다. 러브크래프트가 공포를 이끌어 내는 하나의 방식은 시간적으로 일시적인 것과 영구적인 것을 병렬시키는 방식이었다. 마치 시간 그 자체를 벗어나 있는 듯 압도적으로 영구적인 생을 가진 존재와 덧없고 짧은 시간을 가진 존재를 함께 그려내는 것이다. 짧은 시간 속에 한계 지어진 신체를 가진 인간의 무력함.     


 어쩌면 이런 감정은 러브크래프트에게만 어울리는 감정인 것은 아닐지 모른다. 예컨대 옛 소련의 작가 안드레이 플라토노프는 불멸과 물질적 부, 그리고 성을 대단히 고결한 방식으로 다루고자 했다. 플라토노프는 이상적 공산주의자였는데, 혁명 이후에도 물질적인 조건에 얽매인 현실에 좌절감을 느껴야만 했다. 그는 진정한 혁명을 통해 부르주아적 물질주의와 결혼제도를 모두 극복할 수 있고, 그리하여 진지하게 인간의 영원한 불멸을 실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경제적 부와 육체적 성에 대한 불편함은 어디에서든 발견할 수 있다. 너무나 역설적으로 급진적인 정치적 올바름 운동가들 역시도 정확하게 공유하는 감정인지도 모른다. 정치적 올바름 운동가들은 물질적 부와 육체적 성을 견디지 못했고, 그것을 문화와 혁명으로 초극해야 한다고 믿기도 하니까. 그것이 근대적인 인간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진정한 인간성의 실현이라고 말이다. 물질도, 육체도 없는 불멸의 인간성.     


 외양은 다를지언정, 앵글로색슨 인종주의자인 러브크래프트의 두려움과 저들의 두려움은 닮은 부분이 있는 것 같다. 더불어 너무나 높게 느껴지는 문화적 기대와 그것을 따라가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열등감이 공포를 직시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도 러브크래프트와 저들은 닮았다. 다만 저들이 어딘가 초현실적으로 낙관적인 반면, 러브크래프트는 그 낙관을 냉소한다는 점에서 다르다고 할 수 있겠다.     


3) 인종주의

 우리는 자기가 속한 문화적 사물 체계를 통해 죽음의 공포를 억누르지만, 전혀 다른 신념 체계를 가진 존재와 맞닥뜨리면, 그러한 문화적 사물 체계 전체가 무너질 위험에 처하게 된다.  낯선 존재의 침투는 그저 사회 내에서 자신의 존재감 감소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익숙한 세계에 균열을 일으키고, 안정적으로 상징적 불멸성을 보장해주던 가치체계를 송두리째 파괴하는 경험을 낳는다. 적어도 스스로 삶에 맞서 발자취를 남기기 어려운 연약한 자아를 가진 이들에겐 고통스러운 경험이다.     


『슬픈 불멸주의자』에서는 이를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자신과 다른 인생관을 가진 사람들을 폄하하고, 그들의 인간성을 말살함으로써 우리의 문화에 균열이 일어날 위험을 미연에 방지하려고 한다고 설명한다.    


 연구에 따르면 죽음을 상기한 이후 사람들은 외부 집단 사람들을 덜 인간적이고 더 동물과 같은 존재라고 보게 된다고 한다. 의미심장하게도 러브크래프트의 눈에 비친 이민자들, 혼혈인들 역시 그랬다. 그는 이민자들을 “역겨운 불쾌함을 불러일으키며 마치 악몽에서나 나올 것 같아 소름이 끼치는” 이들이라고 표현하였다. 혼혈인들은 특별하게 정해진 형태도 없는 유기체들로 표현된다.     


 러브크래프트는 현실이라는 커튼 뒤에는 무언가가 감추어져 있으며, 그것이 이따금 그 흉측한 모습을 드러낼지 모른다는 상상에 심취하였다. 굉장히 역겨운 무언가, 다른 생명체나 다른 종, 다른 개념, 다른 지능인 것. 그것은 단적으로 말해 낯선 인간들이 부득이하게 상기시키는 죽음 그 자체이겠지만, 단순히 죽음이라는 두 글자만으로는 그 뿌리 깊은 공포와 무력감을 완전히 표현하기 어렵다.     


 러브크래프트의 작품 속에서 앵글로색슨 백인은 자신의 세계를 무력하게 상실하고 죽음을 맞이하는피해자가 되고, 정체를 알 수도 없는 이민족과 혼혈인들의 희열만이 세계를 뒤덮는다. “그때가 되면 인류는 그레이트 올드 원의 모습을 닮게 될 것이다. 자유롭고 거칠며 선과 악을 초월하여 도덕 윤리라면 모두 거부해 버리고 방탕한 쾌락 속에서 크게 울부짖으며 서로를 살상하는 모습.”     


4) 러브크래프트의 경우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죽음을 당장 직시하지 않고 망각할 수 있도록, 일시적으로나마 우리의 눈을 가려주는 가림막이었을지 모른다. 오늘날 우리는 그 야트막한 가림막이 완전히 사라진 세상에 살고 있다. 나름대로 죽음에 눈길을 주지 않는 방법을 고민하고 힘겹게 삶을 버티면서.      


 러브크래프트에게 그 방법은 삶이란 악하고 부질없는 것이라고 여기며, 그 삶에 맞서는 것이었다. 삶은 언제나 균열과 불안을 일으킨다. 그리고 단선적이고 피할 수 없는 하나의 결말을 안고 있다. 삶은 죽음을 품고 있다. 그러나 현실이 단순히 죽음으로 가는 과정이 아니며, 진실은 그보다 더욱 나쁠지 모른다고 상상하게 되면, 역설적으로 지긋한 공포가 새로운 공포로 변양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러브크래프트는 유한성과 한계, 그리고 너무나 명백하게 주어진 숙명이 만들어내는 공포를 극복하고자 했을지 모른다. 부유함이나 성(性)과 같은 다른 방법을 선택할 수 없어 실패감을 떠안은 자아의 마지막 도피처였을지도.

    

* 사실 이런 글을 쓰는 주제에 러브크래프트나 우엘벡의 본격적인 작품은 하나도 본 적이 없음. 그러니 내 감이 부정확할지도 모르겠고, 언젠가 기회가 되면 찾아봐야 할 듯.     


#필로소픽 #슬픈불멸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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