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IEMPRE Jan 30. 2022

[비평] 역사 '연출'주의의 빈곤

 한 쪽에서는 역사의 종언을 말하고, 다른 한 쪽에서는 거대서사의 종언을 말하던 시대를 지나온지도 제법 시간이 지났다. 거대한 역사적 방향성이 삶과 투쟁의 방향성을 점지해 준다면, 그런 역사가 실종된 시대에 거대 서사에 대해 목마름을 느끼는 것도 당연한 노릇이다.


 코제브에서 후쿠야마로 이어지는 역사관에 따르면 역사는 무의미하게 표류하는 자유주의로 귀결되어 더는 의미 있는 진전이 이루어지지 못한다. 한편 포스트 모던 역사관에 따르면 거대서사는 자체 모순을 통해 무너져 내렸다.


 한쪽은 역사의 임무가 끝났다는 사실에 체념하고, 다른 한쪽은 역사의 주검 곁에서 다양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희망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양쪽 다 의미 있는 역사의 진전을 기대할 수 없다고 본다. 때마침 한국 현대사도 이런 의미의 역사가 끝나는 시점에 발맞춰 형식적 민주화가 정착된다. '투쟁을 통한 정치체제의 변화'가 오랜 기간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


 사람들은 진공 속의 주체가 아니라, 역사적 장소를 가진 주체로서만 자기 자신의 얼굴을 인식할 수 있다. 역사는 주어져야 하고, 역사 속에서 책무를 떠맡아야 한다.


 나는 2010~20년대 일부 정체성 정치 운동집단의 울부짖음 속에서 종종 거대 서사에 대한 갈망을 보곤 한다. 예컨대 황해문화 103호(2019년 여름호)에서 최성용 기고가는 20대의 일부 집단이 일으킨 SNS와 커뮤니티 활동에 주목하며, 산업화와 민주화가 끝나서 거대 서사가 끝났다고 생각한 시점에 고맙게도 새롭게 나타난 흐름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다른 청년 집단들도 이러한 운동에 동참하고, 이런 운동의 작용방식을 적용해 새로운 운동을 펼쳐야 한다고 권고한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작고 다양한 서사들'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렇지만 포스트모더니즘과 쉽게 결합되는 정체성 정치(그리고 PC운동)은 탈역사성을 편안하게 수용하지 않으며, 도리어 역사적 주체성에 대단히 민감한 모습을 보인다.


거대한 자의식을 원하는 운동가들에게 작은 서사, 그리고 여러 동등한 가치를 가진 다른 서사들에 파묻힌 '다양성'의 서사는 빈약하기 짝이 없다. 그렇기에 본인들의 운동에 대해 과도한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예컨대 작은 서사들의 다발을 통해 자유주의의 역사적 한계를 돌파한다는 기획이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은 자유주의라는 역사적 한계선을 뛰어넘을 수 있는가. 사실 자유주의는 이미 보편적인 자유와 인권을 그 내부 원칙을 통해 보장하고 있다. 소수자의 인권, 소수 인종과 성 정체성의 인권 등등 모든 것은 형식적으로든 실질적으로든 보편적으로 동등한 것으로 인정되며, 또 보편적 평등이 실현되는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것은 새로운 역사가 아니라, 이미 펼쳐진 역사의 한 도상에 있는 것이다.   


 포스트 모더니즘 담론은 때때로 이러한 보편주의적 자유주의의 원칙을 뛰어넘는 특수성을 내세운다. 다양성은 특수한 이들, 평준화될 수 없고 계량화될 수 없는 이들을 통해 구현되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이런 접근은 자유주의 시스템, 중립적이고 보편적인 원칙에 따라 운영되어야 할 행정 시스템에 전혀 반영될 수 없다.   

   

 그리하여 현실적으로 포스트 모더니즘 담론에 기반을 둔 정체성 정치는 자유주의를 넘어설 수 없으며, 오히려 보편주의적 인권을 강조하는 자유주의의 원칙을 통로로 삼아서만 정치 사회의 한 담론으로 공론장에 진입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포스트 모더니즘이 아닌 자유주의에 기초한 정체성 정치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서 역사적 의미가 대단히 퇴색되어 버린다.


 이제 이런 운동들은 본질적으로 역사적 의미를 얻기 어렵다. 그래서인지 이런 운동을 바탕으로 역사적 주체라는 자의식을 얻길 원하는 이들은 과한 역사적 ‘연출’에 빠져드는 듯 보인다. 때마침 연출기법도 크게 발전한 시대다. 극적인 충돌과 불화를 고의로 연출하고, 그 속에서 본인들의 미감에 흡족함을 안겨줄 ‘극적인 순간’과 ‘영웅’을 찾아 상징화하여 강조하는 식이다.


 외부 관찰자들의 시선으로 볼 때 이런 인위적인 연출의 과장성과 실제 현실의 빈약함이 일으키는 대비가 크게 두드러져 보인다. 이들이 인위적으로 부각한 영웅을 칭송하는 게 부자연스럽고, 인위적으로 상징화한 역사적 국면에 전율을 느끼기 힘든 것이다.


 심지어 우리나라는 이런 흐름에서 후발주자이기 때문에, 미리 답이 정해져 있는 길을 가는 처지임에도 거드름을 피우는 양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어딘가 답안지를 보면서 연습문제를 푸는 것과 같았다. 그 특유의 인위성은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더불어 이들이 만드는 과한 충돌과 불화는 때때로 그 자체로 퇴행적인 메시지를 허용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결과적으로 이미 보편적 인권에 대한 감수성을 가진 이들의 저항적 심리를 자극해 사회 전체를 퇴행하게 했다. 역사를 연출하려는 노력은 때때로 복잡다단한 현실을 단순화하기도 한다. 연출된 역사에 마치 군더더기처럼 느껴지는 자연적인 불협화음을 강제로 침묵시키거나, 몰아세우는 방식이다. 적지 않은 이들에게 이것은 폭력으로 다가온다.


 국내에서 이런 이들이 내세우는 슬로건이 지난 몇 년간 어떤 변천을 거쳐왔는지 시계열에 따라 나열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이들은 원초적으로 자신들이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주역이라고 느끼고 싶어 했다. 다양성으로 무장한 새롭고 과감한 주체. 그리하여 초기에는 인위적 급진성을 과시하며 호기를 부린다. 하지만 평판이 나빠지자 급격하게 그 모든 호기로움을 포기하고 보편적이고 포용적인 메시지만 남겨놓는 쪽으로 방향을 튼다.  


 “당신들의 시대는 끝났다!”에서 점진적으로 “우린 그저 모두가 평등하게 공존하는 사회를 외쳐왔을 뿐이에요!”라고 외치는 방향으로 이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초기의 극단적인 메시지를 외부인들이 기억하지 말아 주길 바란다.


 유감스럽게도 다양한 주체들의 인권과 평등에 대한 요구는 이미 20세기 후반부에 나름의 정당성을 획득하였다. 이제는 역사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다양한 인구 집단의 의견을 청취하며 인권 의제를 행정 시스템상에 원활하게 녹여낼 합의를 만들어갈 시간이다. 오히려 이런 합의를 통한 행정절차 상의 진보가 극적인 면모가 적고 역사적 주목도는 다소 떨어지더라도 그 나름의 역사적 진전이라는 의미는 갖는 것으로 평가될 수 있겠다.  


 나 또한 우리 세대와 이후 세대의 가슴을 들끓게 하고, 새로이 삶의 목적을 제시해 줄 역사적 방향성, 거대한 서사적 흐름을 발견하길 원한다. 기성 수도권 중산층의 욕망만 수용되는 자유주의 그런 거 뛰어넘을 수 있는 어떤 것. 그렇지만 앞으로 다가올 거대 서사가 미리 정해진 답에 대한 연습문제 풀이는 아닐 것이다. 또 미리 답을 규정하고, 미리 역사적 순간을 연출하려는 노력이 가능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 게 가능하다면 그건 역사가 아닐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에세이] 유치원 놀이터 기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