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정신병과 환상
정신병을 대하는 좌파의 방식
Jacobin지에 Madeleine Ritts라는 사람이 기고한 글("What the Anti-Psychiatry Movement Got Wrong About Mental Illness(2022.03.14, Jacobin")이 내 개인적인 문제의식과 꽤 많이 닮아 있어 흥미로웠다. 무언가 갈증이 해소되는 느낌. Ritts는 그간 인문학적 논변을 통해 정신질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해왔던 일부 좌파의 접근방식을 반성하고, 정신질환자들을 위해서 새로운 방식으로 투쟁하자고 제안한다.
한때 유럽대륙권의 인문 좌파의 신념이란 이런 것이었다. 모든 것은 사회적 구성물에 지나지 않는다. 손에 잡히는 실체란 존재하지 않으며, 객관적인 지식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지배를 위한 권력체계만 존재할 뿐이며, 우리의 지식과 신념은 모두 지배 권력의 영속적인 지배를 위해 구성되었을 뿐이다.
고통, 특히나 정신적 고통 역시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일부 인문 좌파들은 정신질환을 체계적으로 부정하면서, 사실 우리가 정신질환이라 부르는 것들은 모두 지배권력이 개인의 영혼에 남긴 흔적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해왔다. 이러한 권력 작용이 만든 환각이 사라지면 정신적 고통도 사라질 것이다.
좌파가 정신질환을 반대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 접근방식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정신적 고통을 자본주의 체계에서 귀인하는 것으로 보며 자본주의가 정신적 이상증세를 만드는 잘못된 체계라는 입장이다. 다른 하나는 보다 근원적으로 이성중심주의가 이성적이지 않은 것을 정신질환으로 규정하고, 이성의 입장에서 그것을 제단해왔다는 것이다.
비판이론 사상가 에리히 프롬이 전자의 대표적 사상가라 할 수 있다. 프롬은 자본주의 체계 하에서는 빈곤, 착취, 소외가 필연적일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것이 자본주의의 한 본래적 특징이기 때문에 자본주의 체계 속에서 개인들은 정신적 고통을 겪을 수 밖에 없다. 우울함과 불안함, 스트레스는 무엇보다 자본주의 체계가 개인의 정신에 새겨넣는 것이다. 만일 자본주의를 벗어난다면 우리는 다시금 인간적 연대와 협동 속에서 정신적 고통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는 후자의 대표적 사상가이다. 푸코의 주장에 따르면 근대의 이성중심주의가 이성적 인식, 이성적 통제의 범위 밖에 있는 것들, 즉 '광기'를 이성의 통제 하에 가두고 효율적 통제하기 위해 정신병과 정신병리학을 개발하였다고 할 수 있다. 정신병리학은 인간 본성에 대한 심도 깊은 이해가 아니라, 그저 새로운 지배방식에 지나지 않는다. 더 나아가서 이들은 과학으로 불리지만, 사실 정신에 대한 과학은 지배의 구조를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정신질환이란 프롬의 입장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예기치 않은 부산물이라면, 푸코의 입장에서는 근대적 이성의 지배방식이 의도적으로 구성한 지배방식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양쪽 모두 우리가 정신질환이라 부르는 것은 사회적 구성물일 뿐이라는 견해가 담겨있다. 그 속에서 정신질환자라 불리는 사람들은 보호와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이 아니라 거대 지배구조의 '피해자'가 된다.
그것이 무엇이든, 해방을 통해 지금 단계를 넘어서서 다음 단계로 이행하면 우리가 정신질환이라 부르는 것은 사라질 것이라고 본다. 프롬과 푸코 모두 이러한 '해방 이후'의 정신적 아픔이 없는 삶에 대한 낙관적 이상을 갖고 있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제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고통을 보자. 서구권에서는 특히나 68혁명의 실패로 인해 더 이상 비이성와 일탈행위에 무조건적 가치를 부여하기 어려운 듯 보인다. 정신질환을 일종의 환상, 더 나아가 이성중심 지배체계를 극복하는 대안의 길로 보는 경향은 조금씩 힘을 잃었다.
정신질환은 사회적 요인에 더해 심리적 발달, 유전적 요인 등 생물학적 요인 간의 복잡한 상호작용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단순히 사회적 억압이나 착취를 제거한다고 해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신질환은 담백하게 정신질환이다. Ritts는 본인이 현업 종사자로서 환자들이 겪는 생생한 고통을 보아왔다고 이야기한다.
예컨대 신경과학적 연구에 따르면 조현병(Schizophrenia)은 과도한 도파민 분비로 인해 발생한다. 이것은 단순한 사회적 요인에 의한 것 뿐 아니라 유전적 요인의 영향도 많이 받는다.
조현병을 존재하지 않거나 과장된 것으로 취급하며 약을 통한 치료를 받지 말도록 권하는 건 잘못된 일이다. 고통과 위험은 실존한다. 실제로 현실을 명료하게 인식하지 못한 채 무모하게 행동하면 환자 당사자의 사고 위험도 높아질 뿐더러, 실존하지 않는 공포스러운 현실에 고통을 겪기도 한다. 이것을 약을 통해 개선하여 불안정과 혼란에서 벗어나도록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바람직하다.
약을 통해 정신질환을 치료한다는 발상이 좀 인본주의적이지 못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내밀한 감정에 대한 따뜻한 공동체적 관심으로 해결할 수는 없을까. 또 약물 처방은 문제를 개인화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치 개인이 잘못된 것이라고 탓하면서 개인을 시정하는 데에 집중하는 것 같다. 진짜 해결책은 거대한 억압 체계를 쓰러뜨리는 데 있는 것 아닐까.
그렇지만 Ritts는 정신질환의 실존을 부정하고 적절한 약물 치료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게 오히려 신자유주의 우파에게 더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질병이 아니라면, 의료복지의 대상이 될 이유도 없고 그렇다면 거기에 소요되는 비용을 국가가 부담해 줄 필요도 없다는 논리와 연결되기 쉽다.
좌파가 싸워야 할 방식은 "과연 정말로 정신병이란 존재하는가?" 의문을 가지며 정신병을 진단하는 사람들을 억압체계의 하수인으로 몰아세우는 방식이 아니다. Ritts는 좌파가 정신질환자들이 오히려 더 개선된 의료 서비스를 받고, 적절한 약물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힘을 쏟아야 한다고 제안한다.
제약회사의 신약개발이 충분한 검증과정을 거치는 지 투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문제의식이 있다. 부정적인 임상시험 결과는 빛을 보지 못한다. 또 실제 필요에 비해 제약회사의 수익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신약개발과 연구가 편중된다는 문제의식이 있다. 좌파는 이것과 투쟁해야 한다. 그것이 정말로 정신적 고통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돕기 위한 운동이 될 것이다. 또 하나의 산업민주화 운동이기도 하다.
더불어서, 대중적인 편견, 정부의 편견과도 싸울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정신질환자들을 도리어 위축시키는 의료보험 체계를 개선하고, 조현병 환자를 잠재적 살인마로 보며 냉대하는 대중적 태도도 개선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정신질환을 그저 자본주의나 이성중심주의에 만들어진 구성물로 보는 관점은 돌고 돌아서 그저 쉬어빠진 의지론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특히나 여전히 개인의 노력과 의지를 강조하는 국내에선 헌신적인 진보 운동가라 할 지라도 다를 바 없다.
예컨대 해당 진보적 운동가가 일터에서 중간관리직 이상 직책을 떠맡게 되었을 때를 생각해 보자. 그가 보기에 정신질환은 실존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경쟁사회는 좀 문제가 있을 순 있겠지만, 어쨌든 주어진 업무, 맡은 바는 관심과 노력만 있으면 누구나 해낼 수 있고 한 사람 몫의 노릇을 할 수 있다. (사실 바쁘게 업무를 쳐내다 보면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이 없다.)
이 바쁜 현실 속에 경계선 장애, 자폐, ADHD 같은 질병은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정도 일조차 해내지 못하는 저성과자, 더 나아가 실직자나 취업포기자는 그저 의지가 부족한 사람 이상이 되지 못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정신질환자들에게 적절한 사회적 관심이 주어지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그것은 단순한 의지력 부족이 아니라 질환일 수 있음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겠다. 그리고 그런 질환은 어느 정도는 사회적 용인과 관심을 통해 포용할 수 있고, 어느 정도는 전문적인 치료를 통해 개선될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합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