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교회에서 소풍을 가면, 항상 모든 행사가 기도로 시작되었다. 기도 내용은 언제나 똑같을 수 밖에 없었다. 나이든 목사님은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 화창한 햇살과 시원한 바람, 푸른 숲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라고 기도를 시작했다.
이제는 회의주의자가 되어 교회에 나가지 않은지 10년이 넘었지만, 이런 경험이 나에게 일종의 청지기 정신을 일깨워 준 것 같다. 때문에 나는 좀 더 나이가 들고 나서도 자연히 생태운동을 하는 분들을 존경스럽게 느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생태운동하면 환한 햇살 아래 녹음이 드리워진 아름다운 들판이 아닌, 가슴을 찢어내는 절망과 고통, 슬픔으로 가득찬 장례식이 연속되는 광경이 떠오른다. 파괴되어 슬프고, 죽어가서 슬프고, 그래서 슬픔과 동정심, 고통과 좌절에 파묻혀서 흐느끼는 운동이 되었다.
사실 그 뿐이 아니다. 2010~2020년대를 거치면서 모든 부류의 사회운동이 장례식장을 차리고 슬픔의 눈물을 쏟아내는 방식으로 바뀌어 버리고 말았다. 이제 우리는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기 위해 건설적인 희망을 갖기보단 슬퍼하고 애도하는 법을 먼저 배우게 된다.
나는 이런 방향이 올바른 방향이 맞는지 회의감이 든다. 요즘 내가 생각하는 건 이와 다르다. 태초에 우리를 만들고, 아름다운 자연과 생기 넘치는 동식물을 창조한 존재가 있다면, 예컨대 성서 전도서의 구절처럼 우리가 살아 행복을 누리길 바랐을 것이다.
분명 전도서에는 이런 구절도 있다. "지혜로운 사람들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고, 어리석은 사람들의 마음은 잔칫집에 있다.(7:4)" 이는 자신의 죽음과 타인의 고통에 대해 깊이 있게 성찰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만이 전도서의 유일한 메시지는 아니다. 때로 죽음을 잊지 않는 것은 무엇보다 건강하고 낙관적인 삶을 위함이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무슨 목소리든 내기 전에 어떻게든 죽음을 찾아야만 한다. 그 죽음이 누군가에 대한 비난 욕구와, 약자에 대한 감수성을 동시에 부추기면 더 할 나위 없다. 심지어 죽음의 당사자와 가까운 이들이 이런 과열된 분위기를 우려하더라도 말이다.
죽음은 물론 너무나 충격적이고 고통스러운 사건이다. 만일 그것이 사회 구조적 원인과 결부되어 있다면 슬픔은 원망섞인 의분이 된다. 그러나 자꾸만 모든 부분에서 누군가의 죽음, 누군가의 희생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서, 그 죽음만큼 적나라하게 충격적이지는 못한 다른 많은 담론들이 침묵을 요구받게 되는 것 같다.
죽어간다, 죽어간다, 당신들이 죽였다. 우리처럼 슬퍼하고 애도하지 않는 당신은 냉혈한에 악마다. 세상에는 누군가 죽어가고 있다. 죽어가고 있다. 생명이 죽어가고 있다. 장애인들이 죽어가고, 여성들이 죽어가고, 난민들이 죽어가고 하여간 모두들 죽어간다고 한다. 가끔은 미리 장례식부터 차려놓고 누군가의 죽음을 기다리며 미리 눈물흘릴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마저도 든다.
두 가지 부류가 있는 것 같다. 하나는 지나치게 타인의 고통에 민감해서 모든 것에서 슬픔을 발견하지 못하면 견디지 못하는 사람. 그래서 세상의 모든 것에 장례식장을 차려주고 대부분 삶의 시간을 애도하는데 쏟아붙는 사람이다.
또 하나는 실은 별것도 없으면서 검은 넥타이를 매고 짐짓 우울한 표정으로 그런 장례식장을 이곳저곳 오가는 검은 나방같은 위선자들이다. 슬픔이라면 이들이 더 잘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전자는 눈물 흘리느라 대중들 앞에서 기교가 잘 갖춰진 애도문을 읊을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때로는 애도하고 슬퍼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생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이렇게 우울하고 무기력한 기분을 온 세상에 전염시키는게 유일한 목적인 듯 변해버린 운동이 과연 바람직할지, 회의감이 든다. 살아서 화창한 햇살 아래 행복을 함께 누리는 방향으로 더 진취적으로 생각할 수 없을까.
나 역시 살아서 행복보단 슬픔에 압도되는 경우가 많았고, 약자들이 먼저 죽는 잔인한 현실이 너무 무섭고 하염없이 슬프기만 했다. 하지만 이제는 좀 딛고 일어서서, 행복하게 웃는 법을 배우고 싶다. 장례식장을 오가면서 가슴 속에 차오르는 애도감을 음미하며 잔인한 현실에 대한 분노를 품는 시간을 청산하고 싶다. 탈상하고 싶다.
우리 모두가 언젠가는 죽기 때문에, 죽음을 생각해야 한다. 하지만 또 바로 그 때문에 살아있는 동안 끊임없이 죽음만 생각하고 살아선 안 된다. 삶을 더 많이 생각하자. 이제는 좀 죽음보다 살아서 함께 누릴 수 있는 행복한 미래를 그려내는 운동을 보고 싶다.
"나는 생을 즐기라고 권하고 싶다. 사람에게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야 이 세상에서 일하면서 하나님께 허락받은 한평생을 사는 동안에 언제나 기쁨이 사람과 함께 있을 것이다."
- 전도서, 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