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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가 소윤을 구할 수 있는가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를 구할 수 있는가

by 소윤

한강 선생님의 <빛과 실>을 읽고 있다

과거가 현재를 구할 수 있는가

한강 선생님은 쉬이 답을 내리시는 분이 아니지만

결국 선생님의 소설은 과거가 현재를 구하는 쪽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한다 증명한다고 생각한다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하는 일

이야기가 현실을 구하는 일


열일곱의 윤희가 서른넷의 소윤을 구할 수 있는가

나는 예전부터 오랫동안 서른넷의 소윤이

열일곱의 윤희를 구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간밤에 죽지 못해 엉엉 울던 윤희를

이제는 어른이 된 소윤이 의젓하게 건져 올려야 한다고


이 카페에 버스를 타고 오는 동안 두 개의 고등학교를 지나쳤고

하나는 내 모교였다 나는 아직도

고등학교 건물만 보면 마음 한쪽이 미어져

그건 아픈 것도 답답한 것도 슬픈 것도 아닌

미어진다는 말 밖에는 할 수 없는 감정이다


고3때 나는 같은 반이던 한자연에게 매일 모닝콜을 해주었다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인 것처럼 필사적으로

아직도 한자연의 그때 컬러링을 기억할 정도로

얼마 전 한자연과 술을 먹다가 한자연이 조금 취해서 그랬다

사실 나 너가 모닝콜 할 때마다 깨어 있었어

근데 우울증 걸린 사람한테는 어떤 역할을 주면 좋다고 해서...

너 담임이 나한테 너 학교 좀 나오게 해달라고 엄청 부탁한 거 알아?


열일곱에 정신병에 걸린 윤희는 그 후로도 열일곱 해를 더 살아 서른넷의 소윤이 되었다

그런데 나는 서른넷까지 살아온 게 아니라 열일곱을 두 번 산 기분이 든다


*


얼마 전 전혜영이 죽고 싶다고 했다

합정 메세나폴리스 앞을 걸으면서 건물의 층수를 세고 있다고

우리는 서로 죽고 싶어할 때마다 죽지 마 라고 말하는 대신

알아 나도 알아 나도 그래 라고 말하는 식으로 위로해왔다

알아 나도 알아 나도 그래 나도 죽고 싶어


죽고 싶은 사람이 한 명이면 죽음에 가까워지지만

죽고 싶은 사람 둘이 서로의 죽고 싶은 마음을 알게 되는 순간

마음은 의외로 삶 쪽으로 기울어진다


근데 메세나에서 뛰어내렸다가 몸만 다치고 살아남으면 어떡해?

죽는 건 구준호 같은 천재들이나 죽는 거야

구준호는 죽음의 천재라서 깨끗하게 죽은 거야

우리는 죽음의 바보들이라

아무리 죽고 싶어도 죽어지지 않을 거야


그러자 전혜영이 말했다


죽음의 바보 말고 생명의 천재라고 하자


*


지난여름 박단비와 함께 가로수의 초록이 무성한 길을 걸었다

걷다가 박단비에게 말했다


저 초록들 좀 봐봐 징그럽지 않아?


아무것도 해치지 않고 무해하며 저 혼자 왕성한 여름의 초록이었다

그게 너무 징그러워서 미칠 것 같았다

나는 그때 작은 화분 하나 들여놓지 못할 만큼 초조한 마음

거침없이 밀려오는 초록이 순간 아찔했다

잎맥 하나하나 푸르러 생명으로 빛나는 저 초록이

살아 있다고 온몸으로 외치는 초록이


징그러웠고 더 정확히 말하자면


무서웠다


너무너무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생명이


생명력이라는 것이


*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이 카페 유리 통창 너머 초록이 타오르듯 흔들리고 있다

초록은 아무도 해치지 않고 저 혼자 무성하게 그 미친 생명력이

여전히 나는 조금 무섭고

통창을 가득 채운 초록을 바라보며 글을 쓰고 있다

윤희가 소윤을 구할 수 있는가

소윤이 윤희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윤희가 소윤을 구하는 일

그것이 정말로 가능하단 말인가


윤희는 그때 이후로도 열일곱 해를 더 살아 서른넷의 소윤이 되었다

겨우 소윤이 되었지만 간신히 소윤이 된 거기도 하다

개명을 하면서 나는 이렇게 다짐했다

나쁘고 아프고 슬픈 일은 윤희에게 다 떠넘기고

소윤은 기쁘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햇빛처럼 살아가자고

그런 식으로 나는 윤희와 소윤을 필사적으로 분리하면서 살았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야 직면하게 된 것이다

결국 소윤이 윤희를 구하는 건 아무 소용이 없다고

내 시간이 제대로 흐르려면 윤희가 소윤을 구해야 한다고

나쁘고 아프고 슬픈 윤희가

기쁘고 건강하고 행복한 소윤을 구해야 한다고


지난해의 소윤과 올해의 소윤이 달라진 점이 하나 있다면

올해의 소윤은 이제 저 타오르는 초록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게 되었다

한동안 응시할 수도 있게 되었고

삶 산다 생명 생명력이라는 단어들을

지난해보다는 조금 더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윤희가 소윤을 구해야 한다

아침마다 못 죽어서 엉엉 울며 깨어나던 신윤희가

한자연에게 매일 아침마다 필사적으로 전화했던 신윤희가

그런데 실은 생명의 천재라서 지금까지 살아온 신윤희가

이제는 신소윤을 구해야 한다


여름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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