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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사람

난 삶의 아름다움을 몰라. 네가 알려줄 수 있었잖아.

by 소윤

내가 S를 처음 알게된 곳은 홍대의 소규모 인디클럽 ‘빵’이었다. 홍대 ‘걷고 싶은 거리’를 지나 산울림 소극장 근처의 2층짜리 건물, 2층에는 카페 사자, 1층에는 은혜 세탁소, 지하 1층에 ‘빵’이 있었다. 거긴 언제나 햇빛이 들지 않는 곳 특유의 쿰쿰한 냄새가 났다. 빵은 주로, 이제 막 음악을 하겠다고 결심한 뮤지션들이 기타 한 대 달랑 멘 채 첫 자작곡으로 오디션을 보는 곳이기도 했다. 나는 덕분에 저렴한 가격으로, 어설프지만 나름 진정성이 있는 공연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몇몇 뮤지션들은 빵에서 노래를 하다가 유명해져서 권위 있는 상을 타고 지상의 락 페스티벌로 올라갔고, 몇몇 뮤지션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지하의 빵으로 돌아왔다.

S는 그날 공연의 첫 번째 순서였다. S가 첫 곡을 부르자마자 나는 그에게 완전히 매료되었다. 곡이 끝나고 박수를 치려했는데 S는 조금도 틈을 주지 않고 바로 두 번째 노래를 시작했다. 거의 무언가에 쫓기는 눈빛으로. S는 노래를 부르는 내내 관객석 쪽으로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잔뜩 긴장하며, 설렘이나 상기된 얼굴이 아니라 괴로움에 좀 더 가까운 얼굴로 눈동자를 위로 치켜떴는데 그 표정이 마치 목을 매기 직전의 사람이 생과 사를 가르는 고리에 목을 집어넣기 전 계속해서 위를 바라보는 것처럼 보였다. 목을 매는 사람은 천장이 견고하기를 바랄까 무너져버리기를 바랄까. S는 대개 그런 양가감정을 노래하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마치 그 밤이 세상의 마지막인 듯이
미친 것처럼 마셔대도 내일은 밝아오고
뛰어들려고 보니 강물이 너무 더러웠지.
자, 이제 그만 울고 집으로 돌아가자.’


필사적으로 관객의 시선과 박수를 회피하면서까지 무대에 올라야만 했던 당위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다섯 곡 정도를 쉬지 않고 메들리처럼 부른 후 도망치듯 무대를 떠났다. S의 무대가 끝난 후 미안하지만 다른 가수들의 노래는 전부 시시해졌다. 곡과 곡 사이에 관객들과 잡담을 나누는 게 통 지루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노래 속에서 그의 노래를 잊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그가 노래가 끝나고 다시 시작하는 사이에 자신의 곡을 소개하는 최소한의 배려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연이 끝난 후 나는 내가 S의 노래 제목을 하나도 모른다는 것과, 내가 오직 기억하는 가사가 ‘난 삶의 아름다움을 몰라. 네가 알려줄 수 있었잖아.’ 이 한 줄 밖에 없다는 걸 알았다.

‘난 삶의 아름다움을 몰라, 네가 알려줄 수 있었잖아.’



한 달 동안 S의 이름과 이 한 줄을 매일 구글에 서치했다. 그러나 관련된 정보는 전혀 나오지 않았다. 다시는 평생 S의 노래를 들을 수 없으리라는 두려움과 허무함이 엄습했고 나는 거의 우울증에 걸리기 직전까지 갔다. 급기야 내가 보고 들은 것을 의심했다. 사실 그 노래는 세상에 없던 거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난 삶의 아름다움을 몰라, 네가 알려줄 수 있었잖아.’는 돋을새김처럼 도드라졌다. 나는 때론 삶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내’가 되기도 했고 혹은 삶의 아름다움을 알려줄 수도 있었던 ‘네’가 되기도 했다. 그 한 줄 덕분에 애틋했던 관계들을 되짚어보니 아름다움을 모르거나 아름다움을 말할 수 없어서 슬펐다. 그리고 아름다움을 모르는 쪽이든 아는 쪽이든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

한 달 뒤 ‘빵’에서 다시 S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아예 로봇 모양 가면을 쓰고 노래했다. 가면의 눈 부분이 뚫려있지 않았다. 로봇 가면을 챙기지 못한 날에는 어디서 커튼 같은 걸 떼왔는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천을 뒤집어쓰고 노래했다. 안 보이는 곳에서 노래를 부른다면 그냥 혼자 불러도 좋을 텐데, 마치 내가 일기를 쓴 후 남들 눈에 잘 띄는 곳에 일기장을 놓아두고 누가 일기를 훔쳐보면 속상해서 울어버리는 그런 마음인가. 그런 마음으로 원망할 수 없는 것들을 원망하고 원망이 결국 자기를 향하는 것을 알기에 눈을 감고 노래하는 사람. 여전히 그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무대에서 일절 하지 않았고, 오직 노래만 부르며 정해진 시간보다 일찍 무대를 떠났지만 그 조급함이 묘한 절박함으로 바뀌어 전해지곤 했다. 무대를 두려워하는 사람의 노래. 그의 노래는 많은 사람들이 듣지 않더라도, 어떤 누군가는 반드시 들어야만 했다.

‘야수나 곤충보다 무서운 건 사람이지만 천사보다는 사람과 살고 싶다.’



무대에서 내려온 S는 늘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 나도 그를 따라 나가 옆에서 얼쩡거렸다. 그에게 말했다. 노래를 계속 듣고싶다. 메일 주소를 알려줄 테니 곡을 좀 보내달라. 그는 매우 송구스러워하며 메일을 보냈다. 첨부파일 속의 조악한 음원을 열심히 들었다. 노래 가사가 어디에도 올라와있지 않았기 때문에 가사를 한 줄 한 줄 받아 적기 위해 듣고 또 들었다. 틀리고 싶지 않았지만 틀려도 나쁠 건 없다고 생각했다.

‘히키코모리가 히키코모리를 만나려고 하면 히키코모리이길 그만 둬야 한다.’



그는 내 이름과 나이, 사는 곳, 피우는 담배까지 알게 되었지만 나는 S라는 그의 가명과 노래 이외에는 더 알려 하지 않았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까만 피부에 소처럼 큰 눈, 낡은 바지에 쓰레빠(슬리퍼가 아니다, 쓰레빠다. 분명 그것은.) 차림의 그는 거지인 척 위장한 예언자 같은 느낌을 풍겼으나 영력의 반을 잃어 불행한 일만 예감할 것 같았다. 내가 가장 두려워함과 동시에 매료되는 사람의 이미지. 그럼에도 나는 계속 얼쩡거리면서 담배만 피워댔다.

‘나랑 한번만 사랑해줘. 우주의 계획을 넘어서 나를 멸망에서 구해줘. 나의 질병을 치료해줘. 시간의 감옥을 열어서 나를 삶에서 구원해줘.’



그의 가사 속 화자는 비겁한 인간상인 것 같았다. 구원을 남에게 이토록 쉽게 전가해버리는. 그리고 비겁해서 어쩐지 사랑스러웠다. 서로가 서로를 구원이라 믿고 스스로 신이 되는 착각이 들 때가 있었는데, 그때는 그런 착각을 해도 좋았다. 목소리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나는 S의 무대를 볼 때마다 가사의 화자와 노래하는 이를 분리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타인은 지옥이라는 말은 좀 외롭지 않은가.’



S는 냉소적인 가사와 달리 꽤 상냥한 사람이었다. ‘빵’에서 신곡 발표가 예정되어있던 가수의 기타 줄이 공연 직전 끊어졌다. S는 급하게 자신의 기타를 빌려주었다. 공연을 망쳤다며 우는 그녀에게 S는 필사적으로, 네가 내 기타로 그 곡을 연주해줘서 정말 좋았어. 내 기타가 그런 소리를 낼 수 있는지 몰랐어. 라고 위로했다. 태어나서 위로라는 걸 처음 해보는 사람 같군. 뭐든 태어나서 처음 하는 건 애틋하니까. 나는 그에게 내가 가진 무언가를 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가방 속에는 시집 한 권 밖에 없었다. 내일 수업 시간에 함께 읽어야 할 시집. 나는 망설임 없이 그 시집을, 가지고 있는 것의 전부를 줬다. 다음날 옆 사람과 시집을 같이 읽었다. 그 시집은 밑줄 하나 없이 깨끗했는데 아마 같은 구절에 밑줄을 치는 우연을, 나는 은연중에 기대했던 것 같다.

한달 뒤에 그에게 물었다.
그 시집 읽었어요?
아니오. 안 읽었어요.
나는 잠깐 부끄러웠고,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곳의 겨울은 과연 어떤가. 많은 사람들을 만났을 텐데 좋은 동지들이 생겼는가.
다쳤던 팔은 나았는가. 혹시 사랑을 하고 있는 건가.’



이제는 S가 내게 먼저 인사했고 말을 붙였다. 좋아하는 작가가 누군지 물었고 라이터 불을 빌리고 담배를 나눠가졌다. 나는 그것이 가장 두려웠다. 나에게 S는 노래하는 사람이었고, 검은 천 안의 사람이었다. 그래야만 했다. 오직 절망만 예언할 줄 아는 반쪽짜리 샤먼과는 아무것도 나눠가지면 안됐다. 그런데 S랑 있으면 나는 자꾸 무언가를 주게 됐다. 내가 가진 것은 적은데 자꾸 그 적은 것들을 다 줬다. ‘빵’의 무대는 관객석과 지나치게 가까웠고 S는 손만 뻗으면 내 빈곤한 마음을 움켜쥘 수도 있었다. 나는 최초로 열린 그의 단독 공연을 예매하지 않았다.

그게 마지막이었고, 나는 조금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가사를 받아 적다가, 예감의 능력을 조금 훔쳐왔을지도 모르지.

S는 홍대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거의 모든 홍대 클럽의 공연 일정을 뒤져보았지만 S의 이름은 없었다. S를 마지막으로 본 지가 언제인지 기억이 안날 때 즈음의 어느 날, 자정까지 10분을 앞두고 나는 메일의 전송 버튼을 눌렀다.

예전에 시집을 드렸었는데
그 시집은 다음 날 제가 학교에서 공부해야 할 것이었어요
우연히 그게 가방 안에 있었습니다
다음 날 옆 친구의 시집을 빌려 읽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누군가를 좋아해 본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시시한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당신은 저의 어떤 날들을 움켜쥐고 있습니다.

얼마 후 답장이 왔다. 개인적인 내용이라 다 옮길 수는 없지만 요는, S는 더 이상 노래하는 사람으로서의 S를 더 이상 운영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만화로 치면 휴재인 셈이지요. S는 메일에 그렇게 썼다. 나는 S를 시집인 줄 알고 읽었는데 S는 자신을 만화로서 연재했고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를 오독했다. 내가 준 시집이 아직 S에게 있을까? 어쩌면 S는 생각보다 절망하지 않는 사람일수도 있다. 그렇다고 희망적이지도 않은. 옴니버스 만화의 에피소드처럼. 매번 달라지는 주인공처럼. 그러나 나는 S에게 있지도 않은 시의 여백을 만들고 그 빈 공간에서 무엇을 찾으려 했던 걸까. 구원이라고 말하기엔 거창하고 위로라 말하기엔 냉담했던.

아무튼 S는 철저하게 노래하는 사람이었다. 누구의 눈빛도, 박수도, 환호도 원하지 않았고 오직 스스로의 당위에 의해서만 노래하는, 나는 S가 다시는 노래를 부르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나는 S의 노래가, 환히 보이는 끝을 향해 일직선으로, 가면 너머의 완고한 시선으로 달려갔기 때문에 좋아했던 게 아닐까. 나는 그 이후로 홍대를 잘 안 가게 되었다.


‘언제라도 널 보고 싶었어.
너 때문에 울어도 좋았어.
모든 걸 다 바치고 싶은 건 아니겠지만.’


중간중간 작은따옴표로 인용한 부분은 S의 실제 노래가사입니다.

S는 더 이상 노래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이름을 밝히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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