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빗방울자전거

세상에 없는 말을 떠올렸고, 그러자 황홀한 숲이 태어났다.

by 소윤

일을 시작하고부터는 자기 전에 다섯 페이지라도 책을 읽는다. 내가 하는 일은, 보조금을 받기 위해 보낸 서류들을 검토하고 전산에 등록하고 전산과 서류가 상이한 부분은 없는지 마지막까지 대조하는 업무다. 정보가 하나라도 틀리면 누군가는 돈을 못 받게 된다. 하루에 200건 가까운 서류를 빨리 ‘보고’ 해치워야 한다. 일터에서는 아무도 ‘읽는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읽는다’는 말은 ‘본다’로 대체되었고, 읽을 줄만 알았던 나 역시 보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소윤 씨도 곧 빨리 보게 될 거예요’ 라는 격려를 들으며. 집으로 돌아오면 읽을 것이 간절해진다.

예전에, 애인과 함께 걸으면서 서로 좋아하는 ‘말’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맑다, 귀하다, 처연하다, 의연하다, 아슴아슴하다, 온화하다, 은연중에, 계절감, 비실감, 같은 말들. 이런 말들이 우리의 머리 위, 저녁에서 밤으로 넘어가는 사이의 ‘자무’를 수놓았다. 별처럼 박혀서, 우리가 헤아린 단어를 죽 이으면 별자리가 되고 그 별자리가 내가 가야할 길을 분명히 가리키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네가 글을 쓰는 게 좋고, 네가 쓴 글도 좋아.’

그날 밤의 선선하면서도 온화한 기후는 아직 잊지 않았지만 요사이 내가 가장 많이 쓰고 보는 말은 ‘청구’ ‘확인’ ‘신청’ ‘미비’ ‘보완’ ‘조회’ ‘보류’ 같은 것들이다. 내 앞에 쌓인 서류들은 활자들의 창백한 무덤. 나는 박제된 흑백 숲에서 창백한 활자의 무덤을 지키는 묘지기가 된다. 최근의 내 일상은 생활감으로 가득 차 있으나 그 안에서 아주 거대한 비실감을 느낀다. 온도가 없는 활자 속에서. 그러니 퇴근 후엔 도서관 쪽으로 자전거 페달을 힘껏 밟으며 바람을 가를 수밖에. 아직은 날이 선선하고 나는 그 바람을 진심으로 좋아한다.

침묵이 글의 생기를 돋운다. 생기로 충만하다 못해 왕성한 도서관에서도 아직 깨어나지 못한 활자들이 있다. 서가의 입구에는 ‘한권 더!’ 섹션이 있다. 아직 대출 내역이 없는 책들을 최대 대출 권수 다섯 권에 한권 더 얹어줌으로써, 대출을 유도하게끔 만들어진 서가다. 나는 ‘한권 더!’의 책들을 빌린 적이 없다. 대개 이 책들은 시집이나 소설집이다. 이 책들에게 대출기록이 생기고 나면 한국십진분류표 800번 대의 문학 서가로 밀려날 것이다. 문학 서가는 깊은 곳에 있다. ‘한권 더!’의 책을 대할 때마다 딜레마에 빠진다. 빌리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느른하고 안이한 발상이네. 다만 ‘한권 더!’에서 좋은 책을 발견했을 때의 희열은 일반 서가에서 맘에 드는 책을 발견했을 때보다 몇 배로 크다. 나는 그날 ‘한권 더!’에서 그 책을 찾아냈다. 아직 잠들어있는.


코러스크로노스




코러스는 합창, 크로노스는 시간을 주관하는 신이며, 시간 그 자체. 그래서 이 책에는 ‘시간합창’이라는 조어가 종종 등장한다.




「‘데 포케레케레’는 아프리카 원시부족의 말로 ‘미지의 어둠’이라는 뜻이다.
데 포케레케레.
의미를 알 수 없는 낯선 언어가 품고 있는 미지의 어둠.
얼마나 많은 언어들이 눈앞에 까마득한 어둠을 펼쳐놓는가. 얼마나 많은 미지의 것들이 언어의 옷을 입고, 어둠의 얼굴로 떠오르는가.」




사로잡혔다고, 직감했다. 언제나 사로잡히는 것은 빛보다 어둠. 아무 의미도 없는, 말 자체가 미지이자 스스로 의미가 돼어 우뚝 서는 데 포케레케레.



「풍경의 상상으로 바람이 분다. 풍경의 부름으로 밤이 내린다. 너라는 미지의 어둠을 향해. 살았을 때의 습관으로.」



나는 내가, 좋아하는 말들을 정성스럽게 조탁하고 다루었을 때의 습관을 떠올렸다.

그 밤 위로 툭 떨어진다.

그 밤에 나는 ‘온화하다’는 말을 좋아한다고 했다. 네 이름에 쓰인 온화할 은誾. 나는 그 이름을. 그 이름의 ‘은’을, 그리고 온화하다는 말을 귀히 여긴다.

문門 사이에 말言이 있어. 나는 우리의 모든 대화가 그렇다고 느낀다. 쉽게 문을 열지 않고 문과 문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고 주고받는 모양이다. 은誾에는 ‘평온하게 토론하는 모양’이라는 뜻도 있지. 평온하게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나중에는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도 잊어버리고, 그저 말이 좋고 목소리가 좋아져서, 맥락이나 의미 따위는 지워버리고 알 수 없는, 우리만 알아듣는 말들만 남는다. 실체는 없지만 향기 같은. 온화할 은誾에는 ‘향기가 가득 찬 모양’이라는 뜻도 있다.

우스운 소화小話가 있다. 네가 투덜거리며 불평을 했지. ‘누군가가 나를 자꾸 과녁으로 사용해. 내가 그 사람의 도구가 된 것 같다. 이런 기분을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무튼 싫은 기분이다.’ 그래서 나는 ‘그거 답정너네.’라고 대꾸했다. 너는 그 말의 뜻을 듣고 깜짝 놀라, 세상에 그런 말도 있었냐고 나는 몰랐다 이제야 막힌 속이 뚫리는 느낌이네, 답정너 답정너 몇 번 씩이나 되뇌더니 뜬금없이 근데 답정너라는 말 되게 어감이 좋지 않아? 울림소리가 두 개나 들어있다. 나 이 단어를 좋아하게 될 것 같다. 방글방글, 이라는 말이랑 비슷하게 들려. 하면서 그 자리에서 괴상한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

방글방글
답정너
방글방글방글방글 답정너.

나는 눈물을 흘리며 웃다가 결국엔 그 노래를 따라 부르고 너는 이 노래 중독성 있지 좋지 계속 물었다. 나는 그게 바로 답정너라는거야! 하면서 등을 퍽퍽 때렸다. 그래서 그 부정적인 뜻을 가진 단어는 너와 나에게 귀엽고 우스운 소극으로 남았고, 우리가 그 모든 의미를 지워버렸고 의미 대신 어떤 온화함과 향기가 가득한 기억이 담겼고, 나는 그 단어를 떠올릴 때마다 웃는다. 처음으로 알았다. 말하는 모든 순간이 노래가 될 수도 있다는 걸.

방글방글

다시 도서관 책상 앞으로 돌아와 앉는다. 의미를 태우면서 스스로 살아나는 글자들에 관해 상상한다. 조용히 읇조린다. 풍경 속에서는 뜻을 불사르는 불꽃이 타오른다.



시간합창
데 포케레케레




시간들의 합창, 이나 합창하는 시간, 시간 속의 합창, 이라는 말이라면 나는 ‘코러스크로노스’에 사로잡히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 책을 읽고 이런 감상을 남겼다.

‘언어 그 자체가 강력한 소설들이 좋다. 피부에 달라붙듯이 읽힌다. 활자 자체의 황홀함, 글자를 읽고 발음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이곳은 언어가 가진 최대치의 환락, 환락의 정원이자 말의 정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말그물. 그물은 물고기는 낚지만 바다는 낚을 수 없고 말의 그물을 직조하는 것은 조사나 비유같은 것일텐데 그것이 오히려 말을 구속하는 것 같아. 데 포케레케레. 발음하면 입술과 입술이 부딪히는 경쾌한 타악기 소리가 나는데.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을 때, 새로운 단어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입술악기.

그날 이상한 말들을 많이 만들었다. 시간합창처럼, 어떤 시의 제목인 ‘유리우리’처럼. 방글방글 노래를 부르던 그날의 ‘향기억’, 언제나 좋은 순간들을 불러오는 ‘갈피기억’, 말정글, 물방울방, 입술악기, 유리구름고요, 잉걸불보라빛. 데 포케레케레. 내 입술을 흔들었을 때 문이 열렸고 그물에서 벗어난, 그물을 찢어버린 말들이 쏟아졌다. 내일이면 또 다시 활자들이 박제된 흑백 숲으로 돌아가겠지만, 지금의 이 기분은 황홀림이라고 불러야지. ‘코러스크로노스’를 가방 안에 챙기며 가만히 중얼거렸다. 그러자 거대한 숲 ‘황홀림’이 태어났다. 나는 이 책이 800번대의 서가로 들어가는 게 싫어서 반납을 며칠 째 미루는 중이다.

그날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조금씩 빗방울이 떨어졌다. 빗방울 속을 달리는 자전거를 생각하다가 모든 말을 지우니 ‘빗방울자전거’만 남았다.


*「」 안에 있는 문장은 윤해서의 소설 <데 포케레케레>를 직접 인용한 부분입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