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하는 일이 나의 생활과 존엄을 모두 지킬 수 있을까?
좋아하는 일-글을 쓰거나 노래하는 일-을 할 때 나는 단단하고 빛나는 것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보호받고 있다. 내가 쓰고 부르는 것들이 나보다 더 용감하다고 확신한다. 아직 쓰이지도 불리지도 않은 것들 역시 그렇다. 나는 강하고 대담해질 수 있다. 보드 하나에 몸을 맡기고 파도를 타는 서퍼의 기분으로. 나는 내가 이끌고 이끌어 주는 곳으로 간다. 분명히 도달한다.
생활인으로서의 나는 백 점 만 점에 삼십 점? 형편없다. 방을 잘 치우지 않는다. 달고 기름지고 몸에 나쁜 것만 먹는다. 배 터지게 먹고 드러누워 '쓰레기감'을 느끼는 것을 좋아한다. 영양제와 약을 달고 살지만 열심히 밤을 새우고 담배를 피우며 몸을 망친다. 주말에는 게으른 수사자처럼 폭면한다. 계획 없이 돈을 쓰고 나는 왜 돈이 없냐며 운다.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성미는 괴팍하다. 친구도 별로 없다. 체온이 낮은 편이라 자주 배앓이를 한다. 마음의 온도도 낮아서 자주 사람이나 관계를 앓는다. 꾸준히 해내는 것이 없다. 실수 투성이다. 나 자신을 별로 사랑하지 않는다. 나를 사랑하려는 노력 자체가 귀찮다. 세상을 하찮게 보는데 실은 내가 제일 하찮다는 걸 깨닫는다. 가장 좋아하는 문장. '싹 다 개새끼들 같지만 나보단 낫다' (이주란, 윤희의 휴일)
진짜 나는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 잘 살고 있다고 믿는다. 그럼 여기 있는 나는?
알 바냐?
올해 초까지만 해도 나는 내 인생의 중요한 부분을 헐어 글에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 정도 순정이 없었다면 애초부터 한 글자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제대로 된 일을 구해본 적이 없었고... 하루의 축이 없으니 자꾸 늘어져 글쓰기는커녕, 스스로 인생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폐건물처럼 헐리면서 붕괴되고 있었다. 글은 나중에도 쓸 수 있잖아. -가장 위험한 생각-, 취미가 글쓰기인 거 정말 멋진 것 같다. -두 번째로 위험한 생각-. 대학원을 포기하고 구직했다.
입사 한 달째, 발 딛는 곳 전후좌우가 벼랑이고 달팽이의 뿔 위에 선 것 같다. 형편없는 생활인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실수 투성이, 사회성 바닥, 동작 하나하나가, 몸을 이루는 선 하나하나가 어색한 사람. 나한테 무언가가 결여된 건 아닐까? 가끔 일기를 쓰지만 답은 나오지 않는다. 일기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문득 떠올려 보았을 때, 그때서야 맞아떨어지는 돌팔이의 점괘 같은 것.
가능하면 글과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해야겠다. 업은 업보를 쌓는 일, 순정을 맑게 지키고 싶다. 그리하여 나는, 주변 사람들이 들으면 '네가 왜(어떻게) 그런 일을 해?'라는 말이 나올 일을 하고 있다. 9 to 6을 지키고 꽤 자주 야근을 하고, 비효율적이라고 느껴지는 수많은 서류들이 꾸려져 국가에서 돈을 지급하게 하는, 그 중간 과정을 관리하는 일. 그래서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되고, 실수를 하면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그러니까 나는,
실수를 계속 해대고 계획 없이 살아서 왜 돈이 없냐고 울고 꼼꼼함과 섬세함은 지나가는 개 먹이로 던져줘서 물건도 사람도 잃어버리기 일쑤인 나는,
왜 이 일을 하고 있지?
하루의 축이 생겼으니 거기에 맞게 움직인다. 11시에 잠들고 7시에 일어나 8시 40분까지 출근한다. 삼시 세 끼를 일정한 시간에 한식 위주로 먹고, 주어진 분량의 일을 하고 6시에 퇴근한다. 처음에는 내가 한 번도 생각하거나 머물러 본 적 없는 세계의 말이 잔뜩 쓰인 서류의 벽에 (이세계의 통곡의 벽처럼 느껴졌다.) 진력이 나서 집에 돌아오면 탐욕스럽게 소설이나 시를 읽었다. 지금은 여력이 없다. 긴장이 풀려 잠이 탐욕스럽게 쏟아진다.
세계를 만들어 낼 때마다 느끼는 격정은 없는 호수 같은 삶이지만 나는 그런 호수에 던져진 돌멩이 같다. 소윤 씨, 소윤 씨, 소윤 씨, 부를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라고 이 또한 인간을 흉내 내거나 연습하는 인간으로 보일 터. 실수는 당연한 거지만, 대부분은 수습이 가능한 사고만 치지만 여지없이 위축된다. 온몸의 솜털 하나까지 곤두선 채고, 실수를 안 하면 소윤이가 아니잖아요. 하. 하. 하.
공기가 창백하게 질려있어.
나는 돌을 맞은 호수인 걸까, 호수에 던져진 돌멩이일까?
어느 쪽이든, 나를 울리는 소리.
'이격자'라는 말을 쓰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처음으로 만든 말이다. '목격자'가 어떤 일을 눈으로 본 사람이라면 '이격자'는 귀로 들은 사람이다. 귀 이에 칠 격. 귀를 때리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다. 소윤 씨, 첨벙, 이건 왜, 쨍그랑, 이렇게, 콰쾅, 하셨어요? 우지끈.
자꾸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요. 어디서 들리는지는 모르겠는데 계속 들려요. 소윤 씨, 소윤 씨 하고. 의사는 가타부타 말없이 아리피프라졸을 처방해주었고 심리검사지를 내밀었다. 다음 진료까지 해올 수 있겠어요? 검사지에는 손도 안 댔다. 주어진 문장에 예 / 아니오를 체크하고 싶지 않아. 이 목소리는 그런 게 아니다. 내가 들은 말은 직접 받아 적는다.
소윤 씨, 소윤 씨.
왜 이렇게 하셨어요?
왜 이렇게 사셨어요?
매일 마음의 황량한 공터를 듣는다. 뭐 하나 이뤄놓은 게 없군.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지금 살면서 가장 열심히 쓰고 있다. 퇴근 후 틈틈이, 주말에 진득하니 책상 앞에 앉아. 이상한 일이다. 나는 지쳤고 몰려있는데, 단단하고 강하고 대담하게 빛나는 것들이 입술도 없고 성대도 없는 유령말의 장난질에 놀아나고 있는데. 그 유령말을 받아 적는 것에 골몰한다. 들려준다면, 들을 것이다. 좋아하는 것을 지키려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적어도 이것만큼은 건드릴 수 없어' 같은 시간을, 그런 마음들을.
얼마 전 친구와 함께 노래를 만들었다. 노래 부를 때의 이름은 메이로 할래. 5월을 좋아하니까. 좋아하는 걸 하나 더 찾았다. 금요일 퇴근 후에는 잡화점에서 귀엽고 예쁘고 향기 나고 쓸모없는 것들을 많이 봐 둔다. 사무실 책상의 연필꽂이를 치워버리고 내가 좋아하는 펜들만 담아놓은 새 연필꽂이를 두었다. 옷에 향수를 뿌리기 시작했다. (어머, 이거 자기 냄새였구나? 뭐 쓰는 거야?라는 말을 들을 때 좋았다.) 좋아하는 노트에 좋아하는 펜으로 쓴다. 글을 쓸 때마다 그 글에 맞는 노트와 펜을 신중하게 고른다.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애인과 강아지들과 논다. 목을 가다듬고 매일 노래를 부른다. 일기를 쓴다.
이건 절대 건드릴 수 없어.
반짝이는 가짜 보석을 모으는 까마귀의 둥지 같다고 해도.
시궁창에 흘러내려온 금속 날붙이들로
싸구려 반지를 만드는 빈자 같다고 해도.
제단을 만들고 싶었다. 마음의 일부를 온존히 올려놓아 기도를 드릴 수 있게. 그러나 흔들리는 파도나 타오르는 불 위에는 제단을 쌓을 수가 없었다. 아름답고 투명하지만 쌓는 순간 무너지는 물과 불의 제단은.
내 안의 비루한 공터를 들을수록 그걸 더 열심히 받아 적을 것이다. 비로소, 가장 소중한 기도를 드리는 제단은 가장 비루하고 황량한 폐허 위에 쌓는 것임을 깨닫는다. 존엄은 그런 곳에서 태어난다. 내가 삼키는 알약이 빛나는 장미향 유리알이라고 상상하는 그 순간부터.
이것은 일과 생활이 주는 기쁨,
또한 일과 생활이 주는 슬픔.
제목은 알랭 드 보통과 장류진의 글에서 가져왔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