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이어져 있다는 믿음
종점에 가까워진 1호선 용산행 급행은 한산하다. 종점까지 몇 정거장 남지 않았지만 내내 서서 온 터라 다리가 아팠다. 잠깐 자리에 앉는 순간 반대편 창 너머로 해 지는 풍경. 마침 이어폰에서는 엘리엇 스미스가 흘러나오고,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밤의 계곡같은 순간이 올거라는 걸 예감하듯 읊조린다. 열차는 철로를 이탈해 밤으로 간다. 계절은 계절감이, 현실은 비현실이, 실감이 비실감이 되고, 이럴 땐 잠깐 눈을 감아도 좋겠지. 눈을 감는데 목소리가 끊겨버린다. 노래가 멈추고 바깥은 다시 늘 보던 지루한 풍경. 열차는 정해진 곳으로만 향한다는 것을 잘 알지만, 현실로 내동댕이쳐진 충격에 잠시 멍해진다. 이어폰이 고장났나? 아, 그러고보니 블루투스 이어폰을 충전하지 않고 계속 가방에 넣고 다녔다. 배터리가 방전된 모양. 짜증나. 나는 이어폰 두 짝을 케이스도 아닌, 바지 주머니 속에 아무렇게나 쑤셔넣으며 중얼거린다.
처음 블루투스 이어폰이 나왔을 때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다. 지금도 이 생각은 변함 없다. 음악을 듣기 위해 이어폰을 충전하고 기기를 검색하고 블루투스를 연결하는 과정이 너무 번거롭지 않나. 배터리가 도중에 방전된다면? 이어폰을 한 쪽만 잃어버린다면? 무선의 자유로움에 비해 감당할 게 더 많다. 유선 이어폰은 직관적이다. 그냥 단자에 꽂기만 하면 바로 노래가 나오고, 선이 있는 한 음악이 끊기리라는 불안 없이 계속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무선의 세계가 불쾌하다. 아마도 그건, 무선 이어폰이 내가 가장 힘들어하는 일 중 하나인 '관계 맺기'와 비슷하게 느껴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스스로 닳아버리지 않게 미리 각오를 다지면서 충전하고,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을 고르고, 멀리서 그 사람에게 닿기 위해 전파를 쏘아야 하는. 그렇지만 나와 너와 우리의 관계는 종종 끊기고, 내가 방전되거나 당신이 멀어지거나 잃어버린 이어폰 한짝처럼 나를 잃어, 내가 아주 쓸모 없는 사람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사람들 사이에 눈에 보이는 선이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지금 이어져 있다는 직관적인 선이 보였으면 좋겠다. 사실 선이라는 건 이어지는 순간부터 끊어질 것을 각오하고 맺는 일종의 용기 아닐까? (내가 이어폰이 단선되리라는 걸 알고도 계속 사듯이) 그렇다면 이제는 끊어질 게 두려워서, 단칼에 끊어진 선이 눈에 보이는 게 두려워서 무선의 세계로 도망치는 걸까?
나는 타인을 향한 믿음을 쌓기 힘들게 애초부터 설계된 사람. 흔들리는 집이기 때문에 새로 쌓기는 커녕 원래 있던 것마저 무너뜨리는 사람. 한때는 증오했지만 이제는 가장 오래 된 친구라고도 부를 수 있는 나의 악우, 병이 가져가버린 것이 나의 믿음이다.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도 내가 먼저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부정해버리는. 그것으로 상대의 믿음이 단단하다는 걸 역으로 확인하고 싶어하는 못난 마음. 그래서 나는 의심하지 않는 믿음의 영역 안에 들어선 순간부터 그 믿음을 신앙의 범주 안에 넣는다.
타인의 다정함을 곡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때로는 악의조차 선해하는 온기를 지닌 사람들은 그 은근한 온도로 자신의 믿음을 천천히 녹여 선을 만든다. 믿음은 금쪽같이 단단하고 반석같이 거대한 것이 아니라 선처럼 가느다랗고, 유연하게 잘 휘고, 약해보이지만 절대로 끊어지지 않는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을 때 가장 잘 다루어야 하는 건 자신의 믿음. 반석처럼 크고 금속처럼 단단한 믿음을 오래오래 갈고 닦고 문질러서 가느다란 선을 만들고 그걸 누군가에게 잇는 것. 나는 그 믿음을 조각사처럼 잘 다루는 사람들을 동경한다. 돌처럼 무거운 믿음을 일방적으로 이고 지고 사는 것 보다 가느다랗고 가볍지만 탄탄한 선으로 모양을 바꾸어 상대의 손가락에 살짝 걸어버릴 줄 아는 대담성과 용기를 동경한다.
사람의 신체에서 가장 길고 가느다랗고, 선을 닮은 건 바로 손가락. 우리는 약속을 할 때 손가락을 걸고 손을 잡는 것이 부끄러울 때 손가락을 잡고 깊은 애정의 자락 너머로는 손가락이 얽힌다. 선처럼 가늘게 내 몸 밖으로 뻗어있는 이 신체를 통해 우리는 많은 것을 확인하고 믿는다. 믿고 확인한다.
잠들때만큼은 유선 이어폰을 꽂는다. 배터리가 방전되거나 연결이 갑자기 끊길 일 없는. 매일 밤마다 ASMR을 듣는다.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잠들지 못한다. 그러니까 계속 듣고 싶다. 속삭임이 끝나도 계속 듣고 싶다. 선이 이어져 있다면 이 귀가 녹아버려도 들을 수 있다는 믿음을 꿈에서나마 맺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