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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서는 마음이라고 다정하지 않은 건 아니겠지만

나는 그 무책임한 다정함에 조금씩 닳아서

by 소윤


사람의 모서리가 닳으면 사랑, 이건 내가 너로부터 배운 것이다.
그리고 둥근 것들 중에서도 모서리가 다 닳아서 둥글어진 것들을 생각하면 조금 서글퍼지듯이.
다 닳은 사랑이 여기 있다.
아주 오래 끼고 읽은 손때 묻은 책처럼,
아무 곳이나 펼쳐도 원하는 페이지가 나온다.
능숙한 이 기억들을 나는 좋아한다.

너는 내게서 그동안 무엇을 터득했을까 아마도
사람에서 사랑이 되는 것보단 조금 더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것들이겠지 예컨대
내가 어디서 주워들은 말 '너를 이유 없이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미워할 이유를 만들어 줘.' 생각 없이 내뱉으면
얼마 후 너는 그에게 진짜로 미워할 이유를 만들어주면서 의기양양하게 웃는 사람.
나는 도무지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 된다.

오늘 아침에 네가 말했지. 너는 사람에게 기대하는 게 너무 많아. 기대치가 너무 높아. 그건 기대라기보다는
선의와 악의를 둘 다 지닌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래도 선의 쪽이 그 사람의 진심에 조금이라도 더 가깝다고 믿고 싶은거야.
49 대 51이라도 좋으니까.

사람이 사랑으로 닳아가는 과정이 전부 그런 거였어
돌아서는 마음이라 해도 다정하지 않은 건 아닐거라고.
나를 밀어낸다면, 밀려난 만큼의 거리에도 곱고 서늘한 비단같은 마음이 깔려 있어
그 위로 넘어져서 우는 것
거리를 적실 만큼 우는 것

혼자 툭툭 털고 일어나 다시 옆으로 가 앉으면
너는 내가 좋아하는 달걀을 부쳐주고 밥상을 차려오고
내가 먹는 걸 보다 말 없이 물컵을 한뼘 더 밀어주는
그런 무책임한 다정함이 날 조금 더 닳게 한다.

나는 그동안 네 옆에서
내가 어디까지 관대해질 수 있는지, 어디까지 용서할 수 있을지 매번 시험당하면서
언제나 그 시험을 무사히 통과하고
그 과정에서 몇번이고 조금씩 더 닳아서
사람보다는 사랑이 되어가고, 사람을 뛰어넘는 사랑이 되고
너와 있을 때 만큼은 사람보다는 사랑에 더 가까워진다.

너는 내게서 무엇을 배웠을까, 사랑이 되는 법을 배웠을까. 사람으로 남는 법을 배웠을까.

나는 이따금 네가 아직도, 잘도 닳지 않고 네 귀퉁이에 첨단을 품은 채로 사람으로 남아있다고 생각하면
조금 서글프다가 많이 서러워지다가 서러움이 부끄러워진다.

너 나랑 같이
사람 말고 사랑이 되자 사랑이 되기를 바라
말할 수 없었던 건 결국 사랑은, 사람이 하는 거란걸
너는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나는 사랑이 되기 시작하면서
내가 사랑이라면, 너는 사람으로 남아있어야 한다고, 그게 기묘하고 슬프게 맞아 떨어지는 관계의 균형이라는 걸 배웠다.

더운 여름에 결코 손을 잡지 않고
이어폰을 나눠 끼우는 건 아무 소용 없는 짓이라면서 내 양쪽 귀에 이어폰을 다 꽂아주고
내가 읽고 쓰는 것들 중에서 단 한 줄도
너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는 걸 알지만

오래 닳아온 사랑은 마침내 깨닫는다.
돌아서는 마음이라고 다정하지 않은 건 아니라고.
뒷모습에서도 얼굴을 그려 찾아낼 수 있고
등에서도 표정을 떠올릴 수 있다고

시간에도 닳지 않고 사람으로 남아서
지키고 싶었던 건 결국 사랑이었다는 걸
닳아버린 사랑은 안다.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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