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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윤 Jul 25. 2019

글쓰기의 친구들

나의 나쁘고 사랑하는 친구들을 소개합니다


니체의 타자기로부터

최근 읽은 황정은의 소설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에서는 니체의 타자기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사는 것 자체가 끔찍한 고통”이라고 말할 만큼 건강이 악화되었던 니체는 그 무렵 덴마크제 몰링 한센 타자기를 구입한다. 몰링 한센 타자기는 타자기라기보다는 라이팅 볼writing ball 이라고 불려야 더 마땅하다. 사람의 머리뼈를 닮은 반구 모양에 돌기처럼 자판이 튀어나와 있기 때문이다. 라이팅 볼로 글을 쓴다면 마치 생각을 직접 만지는 기분이 들겠구나. 몰링 한센의 라이팅 볼이 조금 더 보급화 되었더라면 타자기나 지금의 키보드는 어쩌면 디폴트가 반구형이었을지도 모른다. 반구형의 키보드로 글을 쓰는 상상을 해본다. 인간의 머리뼈를 닮은 글쓰기 도구라니…….


펜과 노트

라이팅 볼이 인간의 머리뼈를 닮았다면 펜은 인간의 손가락을 닮았다. 육체의 끝임과 동시에 다른 사물, 다른 사람과 접촉하는 시작. 나는 그것이 글쓰기와 유비관계에 놓였다고 생각한다. 글쓰기는 나의 끝, 극점에 도달함과 동시에 타인을 받아들이기 위한 시작점으로 가는 여정이라고 생각한다. 펜 끝과 노트의 면이 접촉하는 순간 형태도 속성도 다른 두 사물이 일체가 된 것처럼 느껴진다. 누군가의 손끝을 쥐어보면 누군가와 연결된 기분이 들 듯이. 손가락이 얽히면 얽힌 손 틈새로 다른 세계가 나타나듯이.

키보드와 모니터

나는 꽤 오랫동안 소설을 썼다. 대부분 컴퓨터 키보드나 노트북 키패드를 사용했다. 키보드와 흰 모니터 화면은 깨끗하면서도 비정한 면이 있다. 그것은 내가 몇 번을 실수해도 실수를 말끔하게 지워준다는 점에서 깨끗하고, 실수의 흔적을 조금이라도 남기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정하다. 손으로 글을 쓰는 이유는 글이 쓰여지는 과정을 봄과 동시에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때로 오기와 비문을 쓸 때, 그 위에 취소선을 죽 긋고,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문장이라면 타투에서 커버업을 하듯 취소선을 죽죽 긋고, 죽죽 그은 흔적이 그대로 남고, 그 날의 컨디션이나 기분, 글의 호흡이나 텐션에 따라 필체 또한 묘하게 달라지고는 하는데 키보드와 모니터는 그런 미묘한 과정이나 변화들이 소거된 채로 오직 완성된 글만을 남긴다. 실수한 흔적을 전혀 남기지 않는다는 건 결국 어떤 실수도 눈감아주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모든 글은 잘못 쌓아올린 벽돌 한 장에서 시작되는 것 아니었나? 깨끗하고 비정한 도구. 나는 일주일 넘게 쓴 소설을 0.5초만에 삭제한 적이 있다. 물론 일주일동안 도입부밖에 못 썼지만 말이다. 그때 내가 무슨 내용의 도입부를 썼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샤워

사실 하루 중 글 생각을 하는 시간은 얼마 안 된다. 그러나 샤워를 할 때만은 내내 글 생각을 한다. 이 글도 샤워를 하고 나온 후에 쓰는 것. 글감이나 첫 문장은 대개 휴대폰 메모장에 차곡차곡 적혀있고 샤워를 하면서 글의 구성을 짠다. 이 문장이 어디에, 이 문단이 어디에 들어가야 할 지를 설계하는 것이다.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내 글은 물의 건축이다. 내게 샤워는 먹고사니즘의 때를 씻고, 문장을 쌓아올리는 물의 의식이다.


카페와 담배
소설을 쓸 때는 책 한 권, 담배 한 갑을 들고 카페에 갔다. 매일 출석한 덕분에 열 잔 먹으면 한 잔 주는 공짜 쿠폰이 세 장. 카페에서의 글쓰기는 어쩐지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이 무렵 담배연기의 건축가였던 나는 글쓰기를 꽤 버거워했던 것 같다. 소설을 좋아했지만 두려웠고, 두려워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사실 나는 ‘즐거운 글쓰기’라는 감각을 잘 몰랐다. 내게 글은 정신적 자해의 수단이었고 스스로를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게 만드는 열등감의 도구였다. (위대한 글이란, 전부 내 글이 쓰이기 이전에 쓰인 글들을 말한다.) 아는 선배가 등단을 하고, 아는 후배가 등단을 하고, 재수 없는 애가 등단을 하고……. 나는 그때의 내가 소설을 잘 못 썼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소설을 쓰는 내내 너무 괴로워했다는 건 또렷이 기억한다. 글쓰기의 고통이 문장을 단련시키고 불행한 경험이 내 글의 자산이 될 거라고 믿었던 시절이었다. 새벽 세시에 노트북을 닫고 집으로 돌아가는 나는 완전히 녹초가 되어 있곤 했다.

소설가 J 선생님
J 선생님은 세계에서 소설을 가장 잘 쓰는 사람은 아니지만 소설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 중 세 손가락 안에는 들 것이다. (물론 J 선생님은 소설도 잘 쓰고 나는 J 선생님의 팬이며 내 방 책장에는 J 선생님의 책이 당연히 꽂혀 있다. 사인 받을 것이다.) 그는 글을 쓰고 소설을 가르치면서 생활을 꾸리는데 나는 그 점을 정말로 존경한다. 글을 써서 돈을 벌 수 있다니, 내게는 마치 초인의 영역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J 선생님이 내게 걸어준 주문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소설이 너를 지켜줄 거야.’라는 말이었다. 이 말을 거의 경구처럼 붙잡고 살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도 J 선생님 말처럼 글이 나를 지켜준다고 생각한다. 학교를 졸업하고 3년정도 글쓰기를 작파하고 아예 돌아앉았는데 그때 세상 풍파란 풍파는 다 겪고 안 좋은 일에 피해자로 연루되어 뉴스에도 나왔다 작년 말,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삶이 궤도 위에 올랐다. 지금 내가 글을 쓰는 이유에는 ‘글을 안 쓰면 인생이 망할까봐. 팔자가 좀 그런 것 같다.’도 들어있다. 얼마 전 J 선생님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선생님, 글쓰기가 고통스럽거나 힘들지 않고 재밌고 즐거워도 되는 건가요?” “완전 최고지. 학교 밖에서 그걸 느끼다니 넌 행운아야. 무조건 써. 막 써.” 아. 또 한 번 주문에 걸려들었네.


더 말할 필요도 없이 가장 좋은 친구. 글을 쓸 때는 좋아하는 책을 옆에 두고 쓴다. 지금 내 옆에 있는 책은 <디디의 우산>

마감
(올바르지 못한 표현이지만) 학교에 다닐 때 친구들끼리 마감을 막암이라고 불렀다. 마감을 못 지킬 것 같아 이불 속에서 엉엉 울었다. 다음 날 J 선생님께 “저 어제 소설을 못 써서 울었어요.” 했더니 선생님은 “나도 울었어.”라고 대답했다. (순간 나는 그가 소설가도 선생님도 아닌 문우로 느껴졌다.) 그 누구도 위로할 수 없는 것이다. 마감만큼 글을 못 쓰게, 또 잘 쓰게 하는 건 없다. 내게는 일요일(오늘은 목요일이다)까지 마감해야 하는 원고가 하나 있는데, 나는 내가 일요일에 갑자기 영민해지고, 대담해지고, 멋있어지고, 마치 돈오처럼 진리를 깨달으리라고 믿고 있다…….

애인

내 글의 첫 번째 독자. 그러나 문장에 감동받지 못하는 불행한 감성을 타고난 인간. 애인은 무심하게 “이거 내 얘기야? 나 이런 사람 아닌데.” “돼지(애인이 키우는 반려동물, 말티즈) 얘기 썼으니까 돼지한테 간식 사줘.” 라고 할 뿐. 그러나 얼마 전 이런 얘기를 했다. “너가 나한테 너무 너라서, 너라는 선입견에 갇혀서 네 글을 잘 못 보는 것 같아. 넌 잘쓰고, 나는 네가 자랑스러워.” 너의 자랑이 되기 위해서라도 나는 쓴다.

쓴다는 말
쓴다는 말이 나를 가장 쓰게 한다. 내가 아무도 아무것도 아니었을 때 내가 나를 쓰는 사람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을 때부터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아니라 쓰는 사람이 되었고 쓰는 사람이니까 쓰면서 몇 번이고 쓰는 사람으로 거듭났다. ‘나는 쓴다’는 말이 주는 일종의 확신, 정체성, 주술, 언령 같은 것. 내가 아무도 아무것도 아닐 때 나는 오직 쓰는 사람이고 쓰는 사람이기 때문에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나는 쓰고 ‘씀’ 자체가 나를 계속 쓰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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