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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윤 Aug 11. 2019

펭귄 꿈

비록 한 순간을 위해 살아갈지라도



데이트를 하던 도중에 은이 말했다.
소윤아, 우리의 인생이 바뀔 시간이 45분 남았다.
그날은 토요일이었고 45분 뒤에는 로또 당첨 방송이 시작될 시간이었다. 나는 은의 농담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은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확고했다.
이번엔 진짜다. 은이 말했다.

오전에 돼지와 푸들이를 산책시킨 후 우리는 햇빛이 잘 드는 은의 방에서 낮잠을 잤다. 내가 누우면 왼쪽에는 돼지가, 오른쪽에는 푸들이가 와서 차례로 네 다리를 죽 뻗고 눕고 은은 푸들이 옆에서 등을 돌린 채로 잔다. 요사이 몸이 부쩍 말라 더 왜소해 보이는 등이다. 잠시 안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여름이니까 그럴 수 없어. 7년이라는 시간은 태양보다 뜨거운 애정보다는 에어컨 바람처럼 서늘한 휴식의 편을 든다. 편을 들어도 서운하거나 서럽지는 않은, 등만 봐도 곤히 잠든 얼굴을 예감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모처럼 세 포유류 덕분에 옥시토신―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분출되는 호르몬, 신뢰감과 사랑, 연대감을 높인다고 한다―이 강처럼 흐르는 따뜻한 낮잠이었다.

낮잠을 자는 동안 꿈을 꿨는데 지금까지 키운 강아지들, 담뚜별이, 그리고 지금 키우는 돼지랑 푸들이가 사이좋게 뛰어놀고 있는 거야. (있을 수 없는 풍경, 별이와 뚜비, 돼지와 푸들이는 눈만 마주쳐도 서로 으르렁거린다.) 그때 왠 펭귄 한 마리가, 정말 귀여운 펭귄이 아장아장 걸어오면서 (은은 이때 펭귄의 걸음걸이를 흉내내며 걸었는데 크고 징그럽고 귀여웠다) 내 품에 쏙 안겼어.

오, 그거 범상치 않은 꿈이다. 나는 솔깃해졌다.

근데 보니까 펭귄 꿈이 재물이 들어오거나 사업이 번창하는 그런 꿈이래. 지난주에 5만원 당첨된 건 티저 예고편이겠지?

7년…….
7년이면 가족 같은 사이다. 가족은 재산을 공유하고…….

너 월요일에 사직서 써라.

그것은 내가 들은 것 중 가장 황홀한 고백이었다.

그때부터 우리는 로또에 당첨되면 무엇을 할 것이며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운용할 지에 대해 땀을 흘리며 진지하게 토론했다. 일단 빚부터 다 갚고. 은은 죽은 아버지가 남긴 빚을 1년 째 변제중이다. 지난 1년간 쓰리잡을 뛴 덕분에 절반 넘게 갚긴 했지만 아직도 미래를 발목잡을만한 금액의 빚이 있다. 문득 은의 아버지 장례식 날이 떠올랐다. 장례식장에서 은은 누구보다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날 보자마자 손을 흔들어주면서. 죽은 건 상관 없는데 마지막까지 귀찮게 하고 가네. 나는 아버지에게 두들겨 맞은 은이 아버지의 지갑에서 만원을 꺼내 스스로 병원에 갔다는 얘기를 떠올리며 같이 웃어줬다. 그때 은은 초등학생이었다. 장례식 도중에 은이 우스우면서도 씁쓸한 얘기를 해줬다. 은과 은의 어머니는 좋게 간 모양도 아니라 장례를 치르지 않기로 했다지만 은의 여동생이 울면서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냐고 지갑에서 자신의 카드를 꺼내 긁었다고 한다.

한도 초과인데요.
은은 휴학하고 모아둔, 등록금으로 쓰일 돈을 헐었다.

은은 화장터에서 아버지 이 개새끼야 하면서 소리를 지르고 욕을 했다. 한 번도 울지는 않았다. 장례가 다 끝나고 은과 나는 씻고 누워서 눈을 좀 붙이려 했다. 그때 내가 주책 맞게 펑펑 울었다. 은은 가만히 내가 우는 소리를 들었다. 은보다 억울하게 방방 뛰는 건 언제나 내 쪽이었다. 얼마 전 은이 결국 학업을 중단했다고 고백했다. 나는 이 로또가 당첨되지 않으면 세계를 저주할 거라고 다짐했다.

종로 순라길 초입에 다다랐다. 우리 방 세 칸 짜리 아파트를 얻자. 내가 말했다. 하나는 내 방, 하나는 너 방, 하나는 담배방 겸 서재. 은이 좋은 생각이라고 맞장구를 쳤다. 우리는 혼자가 필요한 사람들이었다. 혼자 지내온 날들이 같이 있는 순간을 섬광처럼 빛나게 했다. 일주일 내내 착실하게 쌓아온 ‘홀로’ 위에 주말 하루, 둘이 선 순간 비로소 그 하루가 아름답게 빛났다. 나는 하루 일과를 끝내고 내가 은의 방으로, 혹은 은이 내 방으로 건너와 그 날 있었던 일을 조곤조곤 이야기하고 짧게 입맞춘 뒤 다시 각자의 방으로 건너가는 상상을 한다. 은의 걸음 뒤에는 어김없이 강아지 발톱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 타닥타닥, 따라붙을 것이다. 그런 상상들이 나를 살게 한다.

삶은 대체로 오욕의 시간들로 점철되어 있고, 어쩌면 인간은 어느 한 순간, 아무런 모욕도 구차함도 없는 담백한 하루, 혹은 몇 분, 몇 초를 위해 살아가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푹푹 찌는 여름밤에 갑자기 도래한 구원처럼 서늘한 바람이 불 듯. 아 좋다. 순간의 선선한 바람 속에서 은이 말했다. 이건 남극의 펭귄이 보내온 바람이다. 우리는 그렇게 믿었다.

와!
하고 은이 짧은 감탄을 내뱉었다.
안 됐다.
몇 등이야?
낙첨이야.

청계상가와 을지로 사이를 걸었다. 순라길의 아기자기한 카페 풍경과는 대비되는 풍경. ‘재개발이 웬말이냐 소상공인 다 죽는다’ 등의 현수막이 걸려있고, 은은 그것을 보면서 이게 서울이지. 중얼거렸다. 은은 줄곧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줄곧 살았다. 이게 서울이지, 라는 말이 어쩌면 은 같은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걱정마, 다음 주 금요일까지만 출근하면 된다. 내가 말했다. 또 일주일 뒤에 이런 순간이 올거야. 일주일간 착실히 쌓아 올린 모욕과 오욕의 더미 속에서 우뚝 선 우리들의 빛나는 순간이. 그 섬광을 위해 또 한번 참고, 웃고, 홀로 견디고, 그러면서

바람이 한번 더 불었다.

프라하가 뭐 별거냐.

은이 제일 좋아하는 소설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고 나는 언젠가 은이 꼭 한번 프라하에 가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안다. 아마 로또가 당첨된다면 은은 가장 먼저 프라하행 티켓을 끊을 것이다. 어쩌면 편도로 끊을 지도 모르지. 프라하도 여기랑 똑같을 거다. 종로의 낡고 빛나는 간판들을 보며 은이 말한다. OO빌딩, OO호프, 투썸플레이스, 할리스, 스타벅스, 유니클로, OO 칼국수, OO 만두, OO 귀금속 상가……. 체코 사람들 눈에도 프라하가 종로처럼 보일거야. 간판들 덕분에 어떤 밤이 와도 어둡지 않았다.

내가 말했다.
근데 있잖아. 그 꿈 생생했어?
아니, 지금 생각해보면 펭귄인지도 모르겠어.
아, 뭐야 그럼.

개꿈이었네.

우리는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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