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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윤 Aug 18. 2019

최선의 삶

삶은 계속 되어야 해, 비록 그 이유는 잊었지만



말기암에 걸린 이모부가 보내준 복숭아를 나는
아삭아삭 잘도 씹어먹는다
이모부의 이름도 얼굴도 모른다
어릴 적 양녀로 들어간 이모와 다시 만나기까지 십년이 넘었다던 모친은
형제가 모두 죽고 하나 남은 여동생이 애틋하면서도 어색하고
이모는 아이를 많이 낳았다. 일곱명이던가 여덟명이던가
나는 사촌들의 이름도 얼굴도 모른다. 이모부에게
받지 못한 부친의 300만원은 그냥 받은 셈 치겠다고
안방에서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하나뿐인 여동생이 애틋하지만, 모친은
하나뿐인 여동생이 여섯명인가 일곱명의 아이들을 한꺼번에 집으로 데려오는 걸 원하지 않는다

복숭아를 먹으면서 휴대폰을 본다. 연예인 부부의 이혼 소식.
얼마 전 들었던 또 다른 연예인 부부의 이혼 소식이 겹친다
남자가 더 아깝지 않느냐 사실은 여자가 이렇다더라
사랑에 아깝고 안 아깝고가 어디 있겠느냐만은
먼저 신의를 저버리고 치졸하게 군 쪽이 못났지요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그저
네에 그렇네요 남자가 아깝네요 훨씬
맞장구치던 내 모습을 떠올린다 회사에서는
항상 웃고 있다 내가
화난 사람이라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
숨겨야 할 건 없다고 어깨를 펴야지 생각하면서도
왜 들키면 안되는 것들이 늘어갈까

주말에 양궁장에 가서 한 시간 넘게 화살만 쐈지
점수는 커녕 과녁을 맞추는 것조차 버거웠다 그게
마치 나의 독한 말마디 같아서
애인이 얼마 전 내뱉은 한마디
우린 서로 바라지 않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 아닐까
돈이 없어 학업을 포기한 애인이 얼마 전부터 다시 영어과외를
받는다고 했을 때 정말로 너를 존경했지만 한편으로는
너는 과외비를 벌기 위해 공과금과 빚을 갚기 위해
일을 하고 밤을 새워 공부를 하고
너의 가족인 강아지를 돌봐야 하고 그렇다면
너의 최선을 다하는 삶 속에 나는 어디 있는
유치한 생각인 것 같아 그만 뒀어
단 5분만이라도 너를 보러가려다가
결국 양궁장에 간 주말

술에 취한 부친이 벌개진 채로
내가 이혼을 하면 쥐뿔도 없는 너네 엄마
이 집 명의만은 너네 엄마 앞으로 돌려놓고 고시원에 가서 살던지 할테다
모친은 매번 갈 곳이 없어 이 집을 못 나간다고 했었다
처음으로 나와 동생은 같은 두려움을 느낀다

나와 동생은 이 말을 평생 비밀로 간직하기로 무언의 약속을 한다

병원에 갔을 때 약값이 없어서 곤란해하던 찰나
원무과 선생님이 다독이듯이 말한다
미수금으로 달아놓을게요. 어차피
다음에 또 와야 하잖아요
'어차피'라는 말 속에서 다음에 또 병원에 와야만 하는
사람들의 삶을 생각한다
새로 타온 약은 연둣빛 이걸 먹으면
불안하지도 긴장하지도 않아요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을거예요
아, 훌륭한 사람이 되게 해주는 약이구나
언젠가 읽었던 시 한줄
네 약을 먹어라
삶은 계속 되어야 해
그 이유는 잊었지만
문득 올 봄에 보았던 연둣빛들이 무성해진다
아무도, 스스로도 해치지 않고 번성하는 초록빛들
자전거 길에는 느린 우체통이 있어서
1년 후에나 도착할 엽서를 썼다
삶은 계속 되어야해. 엽서를 받아야하니까.
그런 이유로라도.
저는 이 약을 먹고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또 다시 약값을 벌러갈게요 엄마
당신의 딸이 이렇다는 걸 십 년 넘게 인정하지 못하는 엄마

모친은 꿈에서 내가 집에 온통 불을 질렀다고 했다
꿈 속에서 불을 지른 나 대신 꿈 밖의 내가 사과하면서
아프다는 건 무엇일까 가장 가까운 사람들은
결국 아픈 부분만 서로 꼭 닮는걸까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제 내 악몽 얘기를 써볼까. 끊임없이 당신이 등장하는
그때 당신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서는
복숭아 더 먹을래? 더 깎아줄까?
나는 황급히 펜과 노트를 치우고 괜찮다고 말한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다 괜찮아요.
나는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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