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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윤 Aug 23. 2019

그들 각자의 무대

우리 모두가 본 것은 서로 다르다

예~전에 서울예대 학보에 기고한 글입니다. 졸업한 지 오래돼서 올립니다.




겨울방학부터 대학로의 한 극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연극이나 무용 공연을 보러온 관객들을 안내하고 돕는 관객 안내원 일이다. 관객 입장이 끝나면 나는 관객석 구석에 몸을 숨기고 어둠 속에서 없는 사람처럼 앉아 있어야 한다. 공연이 시작되고 관객들은 하나의 무대에 시선을 집중한다. 나는 관객들을 바라본다. 공연에 진지하게 몰입한 모습이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눈빛이나 표정의 세세한 결은 제각각 다르다. 나는 그들이 결국에는 어떤 무대를 가지고 극장 밖을 나서게 되는지 궁금해진다. 표정을 이루고 있는 결들이 조금씩 다른 것처럼 그들이 가지게 되는 무대의 결도 조금씩 다를 것이다. 지금은 하나의 무대를 바라보고 있지만 어느 순간 그들이 보게 되는 것은 ‘그들 각자의 무대’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언젠가 수업시간에 영화 <잔 다르크의 수난>을 본 적이 있다.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잔 다르크의 얼굴이 흑백 스크린 안을 가득 채운 순간 내가 보았던 것은 울고 있는 잔 다르크의 얼굴도, 그녀를 연기하는 배우 마리아 팔코네티의 얼굴도 아닌 제 3의 얼굴이었다. 형언할 수 없는 낯섦이었다. 나는 스크린을 가득 채운 그 얼굴이 어느 순간 스크린을 넘어섰다고 느꼈다. 그것은 스크린 너머의 얼굴이었다. 그 울고 있는 얼굴은 영화를 본지 1년이 지난 지금도 내게 말이나 문장으로 표현할 수 없는 강력한 이미지로 남아 있다. 나를 포함한 수업시간의 모든 학생들이 영화를 보고 있었지만‘그 얼굴’은 오직 나 자신만이 만날 수 있었다. 다른 학생들도 마찬가지로‘그 얼굴’을 만났을 것이다. 내가 만난 그 얼굴이 무엇인지 다른 사람들이 알 수 없듯이 나도 다른 이가 만난 얼굴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스크린 너머에 존재하는 스크린 속, 그것과 마주한 단 한명의 관객이 볼 수 있는 단 하나의 얼굴이었다. 지금까지 그 오래된 영화를 보아온 수많은 이들과도 나누어 가질 수 없는 얼굴이었다. 영화는 스크린 너머에 더 많은 스크린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관객석에서 무대로 시선을 옮긴다. 좋은 무대는 무대 너머에 더 많은 무대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만일 관객이 100명이라면 그 무대는 무대 너머에 100개의 무대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내가 <잔 다르크의 수난>에서 나만이 볼 수 있는 단 하나의 얼굴을 보았듯이 말이다. 100명의 관객이 다 같이 바라보는 무대가 아니라 오직 단 하나의 관객만이 볼 수 있는 단 하나의 무대. 공연은 그들 각자의 무대를 찾아가는 여정이 된다.함께 여정에 동참한 사람들도 언제부턴가는 각자의 비밀스러운 길을 따라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느 지점에서 무대 너머의 무대와 맞딱뜨렸을 때,홀로 알 수 있는 단 하나의 무대를 만나게 되었을 때, 낯선 문을 비로소 열게 되었을 때 그 무대는 잊을 수 없는 감각으로 극장 안의 관객, 아니 극장을 떠난 후에도 한 사람의 내부에 오래 맺히게 되고 그이의 삶 자체에 생생하게 육박할 것이다.

공연 시작 20분 전, 나는 게이트의 문을 연다. 입장하는 관객들 한 분 한 분께 인사를 건넨다. 정해진 좌석에 앉아 공연이 시작되길 기다리는 그들의 눈빛은 환하다. 서서히 관객석은 어두워지고 무대에 조명이 들어온다. 나는 다시 어둠속에 몸을 숨기며 무대와 무대를 바라보는 눈빛들을 본다. 오늘도 그들이 무대의 빛 속에서 그보다 더 환한 눈빛으로 그들 각자의 무대를 잘 찾아가기를 기대해 본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공연이 하나의 몸 안에 깊게 들어와 부딪히며 기묘한 무늬를 이루는 그 순간, 그 무늬를 그려내는 내밀한 지도를 분명 읽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각자의 무대를 찾아가는 여정이 언제나 낯설고 아름답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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