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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윤 Aug 25. 2019

관계의 나이

우리, 지금 얼마나 자라고 있나요?

나는 올해 스물 여덟, 은은 서른 셋. 다섯 살 차이가 나지만 우리는 서로 크게 나이차를 느끼지 않는다. 친구처럼 야, 너, 이름을 부르고 대화에서도 위 아래 다섯 살의 간격을 실감해 본 적이 없다. 심지어 은은 형, 누나, 오빠, 언니처럼 그 사람의 나이를 알게 해주는 명사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게 부르지마. 내가 은을 그런 명사로 불렀을 때 은은 이름을 불러달라고 했다. 은은 가끔 친구의 나이를 잊어 올해 네가 몇살이었지 묻기도 하고 심지어는 내 나이도 잊어 네가 스물 일곱이었던가 되묻기도 한다. 나 역시 정확한 나이를 모르는(생각하지 않는) 지인들이 몇 있고 다른 사람에게 은에 관해 말할 때 몇살이었지, 잠시 텀을 두고 말한다. 그렇다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해'라는 건 아니다. 사회의 나이보다 더 중요한 나이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은과 데이트를 하던 도중 내가 말했다. 사람과 사람끼리는 저마다 맺고 있는 관계의 나이가 각각 다른 것 같아. 은의 눈이 흥미롭다는 듯 날 쳐다보고 나는 살짝 희열을 느끼며 말을 잇는다. 너랑 나랑은 7년을 만났잖아. 우리가 스물 여덟, 서른 셋이라는 사실은 잠시 잊고 우리 관계의 나이만 생각해보자. 일곱 살, 겨우 일곱 살? 벌써 일곱 살? 어떻게 생각하든 일곱살이야. 그러니 자주 넘어지고 다치고 상처가 나는 일은 당연해. 그렇지만 이제 막 판단을 하고 사리분별을 하고 옳고 그름을 알게 된 만큼 요새 들어선 서로를 더 아껴주려는 것 같아. 암튼 우리는 서로 미워하면 안돼. 아이는 아직 할 수 있는 것보다 못하는 게 더 많으니까. 때론 아이만이 할 수 있는 것도 있고. 동의해. 은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은의 '관계'는 우리의 만남과 동시에 갓 태어났다. 신생아가 몸을 꽁꽁 싸매두지 않으면 제 몸에 놀라 스스로 상처를 내듯 은과 나는 서로를 할퀴었고, 그러면서도 작은 손바닥 위에 손가락을 대면 본능적으로 그것을 꾹 잡듯이 서로의 손을 잡았다. 그러던 '관계'가 자라서 걷고 말하고 뛰고. 여전히 우리는 서로에게 일곱 살처럼 굴 때가 있다. 아 이제 넘어지거나 다쳐도 덜 울겠구나. 나중에는 울지 않고 툭툭 털고 일어나겠구나. 그러면서도 원하는 걸 얻어내지 못하면 화를 내고 울어버리는. 옳고 그름을 깨닫고 사리분별을 하지만 아직 모르는 것 투성이인 일곱살처럼. 아끼는 마음만으로는 이어지기 힘든 벅찬 관계.

우주의 창백한 푸른 점 지구에서 먼지같은 존재인 사람일지라도 누군가와 만나고 관계를 맺는 일은 사람들 각자가 다른 우주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렇게 다른 우주에 접속하면서 결국 내 안의 우주를 발견하는 일이다. 이 아름다운 지구에서 두 개의 다른 우주가 만난다면 어떻게 될까? BANG! 폭발은 필연적인 것.

그러나 폭발이 별을 낳듯이 '관계'라는 별이 탄생과 함께 주는 수많은 아름다움은 때로는 푸른 연기로 이뤄진 행성처럼 부질없기도, 때로는 달의 바다처럼 적요하기도 하다. 이제 막 태어난 별이 불타오듯이 뜨거운 관계맺음의 시기가 지나면 비로소 이 '관계'는 한 살 한 살 자라거나 한 살 한 살 퇴보한다. 오랜 만남의 기간이 '관계'의 성숙함을 담보해주진 않는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더라도 느긋한 노부부처럼 원숙한 '관계'가 있는가하면 7년을 만났는데 이제 7살이 된 '관계'도 있듯이.

내 우주 안에 있는 몇 개의 별. 가족, 연인, 친구, 직장 동료. 어떤 별은 이제 소멸을 앞둔 백색왜성일수도, 어떤 별은 지금도 폭발을 거듭하며 자라고 있는 중일지도. 어떤 별은 얼음행성처럼 어느 순간에 얼어붙어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을지도. 나와 은과 '관계'는 삼인사각 달리기를 하듯 셋이서 한쪽씩 다리를 묶고 비틀거리며 뛰고 있다. 스물 여덟과 서른 셋의 만남이 아니라 일곱 살 '관계'를 앞에 둔 두 사람이 서로 만났다고 생각하면 어쩐지 작고 약한 것을 함께 돌보는 사람들처럼 서로가 조금 더 애틋해 질 것만 같다.

나는 당신의 나이가 궁금하지 않다. 다만 우리 관계가 지금 자라고 있는지, 혹은 늙거나 죽어가고 있는지. 우리 관계의 나이가 몇 살쯤 되었을지는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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