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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윤 Sep 01. 2019

어디서부터 이야기하면 좋을까

아무런 이야기도 할 수 없을때는

헤밍웨이가 그랬던가. 글이 안 써지면 뒷산에 올라가 목을 메라. 그리고 목을 멘 이야기부터 써라. 역시 매일 1500자를 하루도 빼놓지 않고 쓰던 기백이 느껴진다. 아쉽게도 우리 집 근처에는 뒷산과 목 멜 나무가 없고 강물에 빠져 죽기엔 동네 하천이 너무 더러우며 옥상에서 뛰어내렸다간 진짜 죽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이야기하면 좋을까? 에세이를 쓴다는 건 일상에 편집점을 만드는 일. 강바닥에서 사금을 캐듯 소중한 순간을 오목하게 뜨는 능력. 마치 푸딩을 뜨는 티스푼처럼 가볍게. 입사 전 나의 일상에는 그런 오목한 여유가 있었다. 지구가 망하는 일은 신이 가볍게 푸딩 한 조각을 떠먹는 것만큼 간단한 일이지. 농담 할 수 있을만큼. 그렇다면 지금 나의 일상은?

집.
회사 (야근)
다시 집. 잠
회사 (야근)
집. 잠.

지구는 좀 더 와일드하게 망하는 것이 좋다.

야근을 하면서 10월 말에 나올 잡지에 기고한 글의 교정을 봤다. 오피스데스크라이터. 내가 나 자신에게 붙인 또 다른 이름이다. 글은 어디에서나 쓸 수 있고 무엇이든지 쓸 수 있다. 그런데 다시 글을 쓸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이 두려움은 어디서 기원하는 걸까.

글을 쓰지 않았던 때의 이야기를 해볼까.

그야말로 작파하고 돌아앉아, 글 안쓰고 돈 벌 거예요.라는 얘기를 공공연하게 해댔다. 그 기저에는 내가 언제라도 글을 쓸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던 것 같다. 다시 글을 쓴다면 글이 나를 받아줄 수 있다는 무책임한 낙관. 그래서 몇년 간 안 썼다. 글을 쓰지 않는 동안의 나는 아프지도 괴롭지도 않았다. 아프거나 괴로울 '내'가 없었기 때문에. 마음이 무뎌지면 실제로 감관도 무뎌진다. 매일 이를 악물고 잤는데 아프지 않았다. 나중에 치과에 갔더니 이가 열 세개가 상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와중에 내가 아는 사람들은 글로 돈을 벌고, 명예를 얻고.

사주에 현침살이 끼었다고 한다. 날카로운 것을 쥐고 살아야 한단다. 공부를 못 해서 의사가 못 됐고 손재주가 없어서 미용사가 못 됐다. 남은 것이 펜 뿐이라 팔자 소관대로 살아야 할 것 같다. 이런 생각이 들게 된 건 아르바이트 도중에 폭행사건에 연루되면서 부터였다. 글을 안 쓰는 몇년 간, 월급을 체불당하고 이유 없이 욕을 먹는 나날의 연속, 송사와 분쟁을 겪고 인정투쟁에 시달리고 마침내! 폭행사건의 피해자가 되어 뉴스까지 탔다!

글을 쓸 때의 나는 그저 학교 도서관 집만 오가면서 열심히 글만 쓰면 되는, 작고 투명한 어항같은 평화를 좋아하던 사람이었는데. 폭행사건 이후 일을 관두고 백수가 됐다. 그리고 백수(정해진 날짜, 정시, 정각에 새로운 일을 하는 것을 좋아한다)답게 2019년 1월 1일에 첫 에세이를 썼다.
'손에 쥔 백동화처럼 작고 평평한 평화를 누려야지'

글을 쓰면서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일'이라는 걸 알았다. 어떤 특강에서 이케아의 인기 비결을 밝혔다. 완제품이 아닌 부품 상태에서 가구를 조립함으로써 내가 그 가구를 만들어냈다는 성취감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오피스데스크라이터, 쓰는 사람. 이런 이름이 없었다면 난 아무것도 아니었을테니까.

근거는 없지만 나는 어쩐지 글을 안 쓰면 인생이 좀 망할 것 같고 그래서 지금 이 마음과 이 순간이 두렵다. 목을 메는 마음으로 쓴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지 모르겠을 때' 그 모르겠는 이야기부터, 바로 지금을 쓴다.

문득 대영박물관에 갔던 때가 생각난다. 오래된 유물과 죽은 화석들의 시간을 고무처럼 길게 늘인 곳. 시간이 흐르는 곳이 아니라 머무른 채로 길게 늘어져 있는 곳. 그곳에서 유일하게 '지금'을 사는 곳은 오래된 시계를 전시해두는 공간이었다. 여전히 시계바늘이 돌아가고 여전히 판 위의 구슬이 굴러간다. 만약 나의 일상이 이대로 단조롭게 흘러가다가 마침내 고무처럼 늘어나 시간의 흐름도 분간할 수 없게 된다면, 그때 나의 글이 지금을 살게 하리라고 믿는다. 그런 것 하나쯤은 남겨두고 싶어서.

두려울 때의 나는 나보다 문장을 믿는다. 나보다 멀리 나아가는 나의 글을 믿고 나보다 오래 사는 나의 글을 믿는다. 가끔 나를 벗어난 글이 나를 이끈다. 그럴 때 나는 글을 조용히 따르면 된다. 내 글은 나보다 더 대담하니까. 회사 책상 앞에 앉아서도 대영박물관보다 더 먼 곳까지 갈 수 있으니까.

여전히 두렵다. 무슨 이야기를 하면 좋을 지 모르는 이 순간이, 두서없이 아무 말이나 하게 될 것 같은 이 날들이. 나중엔 입을 다물어버리게 될 것만 같은 날들이. 그리하여 좀 못난 글이라도 이것은 분투의 기록이다. 글은 답을 알고 있다. 쓰기 전까진 답이 나오지 않는다. 어디서부터 이야기 할 지 모르겠을 때 나는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좋을 지 모르겠다고, 지금을 살고 있는 글을 쓸 것이다. 그 다음은 아직 쓰지 않은 문장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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