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윤 Mar 20. 2020

안녕, 용기를 가져.

작은 창문으로 많은 빛이 들어와 나를 오랫동안 앉아있게 한다.


제목은 신동옥 시인의 시집 '웃고 춤추고 여름하라'의 시인의 말에서 가져왔음을 밝힙니다.

안녕, 용기를 가져

글을, 하루에 단 한 줄도 쓰지 않는 날이 늘어갔다. '내 글'을, '내 문장'을. 에세이도 일기도 쓰지 않는다. SNS에 가벼운 글조차 업로드하지 않는다.

이직한 지 한달이 조금 넘었다. 출판사에서 신입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그동안 어떤 일을 하건 사무실 책상만은 늘 깨끗했는데, 지금은 장편 소설 원고와 족히 20편은 넘어가는 단편 소설 원고, 드문드문 읽다 만 책들이 질서 없이 쌓여 있다.

원고에 피드백을 남겨야 하는데, 다들 정성들여서 쓴 글인데. 내가 누구보다도 가장 잘 읽고 좋은 방향을 제시해줘야 하는데. 한 줄도 쓰지 못한 빈 문서 1 위에서 깜빡거리기만 하는 커서는, 텍스트를 다 소화시키지 못한 내가 헉헉거리며 쉬는 숨처럼 나를 조급하게 만든다.

집에 돌아오면 약을 열 두알씩 삼키고 도망치듯이 잠든다. 꿈에, 내가 제대로 읽어내지도 못한 글들이 제멋대로 뒤엉켜 괴물의 형상으로 나올까봐. 입사한 지 한달째 되는 날, 편집장님께 면담을 요청했다. "제가 평생을 걸고,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한다고 믿었던 일이, 실은 제 적성에 맞지 않는 거라면 어쩌죠?" 처음으로 글이 무서워졌다. 회사에 있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한 줄도 읽고 쓰지 않았다. 생전 보지도 않던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고, 휴일마다 잠으로 도피했다.

한 줄도 쓸 수 없을거야. 다음 생이 만약 있다면, 글 같은 건 쳐다보지도 않을거야. 토요일마다 의사 선생님 앞에서 나는 앞으로 한 줄도 읽고 쓸 수 없을거라며 울었다.

글을 피해다닌 지 한 달이 넘었다. 사실은, 그렇게 사랑하지 않았던 걸지도 모르지. 적성에 안 맞는 걸수도 있어. 그냥 돈 벌기 위한 노동일 뿐이야. 오랜 짝사랑을 비로소 접었다. 주어진 글, 돈을 벌기 위한 글만 간신히 읽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읽고 쓰지 말자. 마음을 정리하니 후련함마저 느껴졌다. 그때, 내 안에서 무엇인가 말을 걸어왔다. 며칠 째 내 안에서 울리는 말들을 나는 받아적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글은 그 울림을 받아적은 기록이다.

안녕, 나는 아직 네가 쓰지 않은 문장이야.
아직 쓰이지 않은 문장의 말을 문장으로밖에 옮겨 적을 수 없다니, 아이러니하지.
그럴지만 너는 언제나 말할 수 없고 글로 쓸 수 없는 것들을 써보기 위해 골몰했잖아. 이 목소리도 그 시도의 연장선상이라 생각해.

너는 언젠가 이렇게 생각한 적이 있어. 말을 내뱉는 순간 말의 그물을 유유히 빠져나간 것들은 모두 어디로 가는 걸까. '사랑'을 말하는 순간 사랑 밖의 모든 말들은, '고백'이라고 말하는 순간 '고백'이라는 단어 뒤에 숨어버린 진짜 감정들은 모두 어디로 가는 것일까. 하고.

한때 너는 그런 것들이 햇빛이 되어 내린다고 생각했어. 언젠가의 초여름, 작은 방 안에 누워 창문으로 쏟아지는 햇빛과 반짝이며 부유하는 빛먼지들을 보고, 따뜻하고 서글프다고 느꼈던 건 그 때문이라고.

따뜻하고 서글프다. 너는 고작 그렇게밖에 쓸 수 없어서 더 외로워졌지. 외롭다고밖에 말을 못해서 외로움조차 없는 혼자였지.

오늘 회사 흡연 구역에서 담배를 피우면서도 생각했어. 오늘은 볕이 너무 좋았어. 흡연구역은 그늘져 있었고 너는 서둘러 담배를 비벼 끄며 중얼거렸어.

빛 쪽으로 가자. 빛 쪽으로 가자.

왜 그렇게 두 번씩이나 중얼거렸는지 너는 알 수 없어. 다만 그 말은 네가 살면서 절실한 순간에 뱉은 모든 말마디를 다 합친 것보다 더 절실했을거야.

'소창다명 사아구좌'라는 말을 떠올려. 작은 창문으로 많은 빛이 들어와 나를 오랫동안 앉아있게 한다. 창문이 작아도 빛은 얼마든지 쏟아질 수 있어. 너는 그 말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면서, 절망해. 왜 모든 아름다운 말들은 누군가가 이미 다 써 버린걸까. 세상에 쓸 수 있는 귀한 문장의 총량은 정해진 채로 어단가에 보관되어 있고 너는 그 근처로 다가갈 수도 없다고 생각해. 선택받은 사람들만 조금씩 꺼내 쓸 수 있다고. 너는 평생, 이미 쓰인 아름다운 문장들을 입 속에 사탕을 넣고 굴리듯이 소비하는 삶을 살 수 밖에 없을거라고 절망해. 따뜻한 빛을 맞으며 홀로 누워 있던 그때. ......은 어디로 가는 걸까. 그 ......은 무엇일까. 너를 차마 울 수도 없게 만드는 그것은.

나는 아직 네가 쓴 적 없는 문장이야. 너는 글을 쓸 때마다 그랬어. '아직 내가 쓰지 않은 문장을 믿고 간다'고. 너는 어딘가에 '아직 쓰지 않은 문장'이 있고, 그 문장이야말로 네 몸 위로 쏟아졌던 모든 빛을 껴안고 있으며, 너는 그 문장을 찾아내 씀으로써 비로소 할 수 없던 말을 할 수 있을거라고. 네가 쓰는 글은 '아직 쓰지 않은 문장'을 믿고 찾아가는 여정이라고. 그리고 너는 썼지. 쓸 수 있는 문장만을, 말할 수 있는 말들만을, 털어놓을 수 있는 비밀들만을. 선생님께 도장을 받기 위해 일기를 쓰는 학생처럼.

그리고 너는 이제 '아직 네가 쓰지 않은 문장'을 증오해. 너를 가두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아무 것도 없어서 오히려 갇힌 것 같아. 벽과 문이 있어야 바깥의 자유가 생겨. 문장에는 안도 밖도, 공간도 없지. 오직 그 한줄만으로 온전하지. 그런 문장을 쓰고 싶었던 거잖아. 네가 감히 쓸 수 있으리라고 믿으면서.
오만하게도.

너는 언젠가 그 온전한 문장의 근처까지, 어떻게든 도달해봤던 경험을 떠올려. 학교 도서관에서, 오랫동안 완성하지 못했던 소설을 끙끙거리며 붙잡고 있다가, 끝내 섬광처럼 마침표가 찍혔을 때. 너는 도서관 밖을 뛰쳐나와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녔어. 옆에서 담배를 피우던 선배가 '쟤 왜 저래' 하는 소리도 못 듣고.

너는 그때 날뛸만큼 기쁘고 후련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도 역시 '아직 네가 쓰지 못한 문장' 근처에도 다가가지 못했지. 다가간 것 같다고 착각했을 뿐. 네가 쓰고 싶은 문장은 언제나 너를 비껴가지. 봐, 지금도 노트를 네 장째 채우고 있는데 결국엔 써내지 못했잖아. 이 노트는 다 써가고 남은 장 수는 한 장이야. 너는 앞으로 네 방을 가득 채울 만큼 노트를 사서 그 노트를 다 채울 만큼 글을 써제껴도 나를 쓸 수 없을거야. 아직 쓰지 않은 문장을, 앞으로도 쓸 수 없을거야. 너는 죽어도 쓰지 못할거야. 그러니까.

믿지 마.
아직 쓰지 않은 문장을 믿지 마. 언젠가는 쓸 수 있을거라고 믿지 마. 너를 완벽하게 만족시키는, 완전한 문장이 있을 거라는 걸 믿지 마. 네 몸에 닿았던 그 햇빛은 그저 햇빛으로 남겨둬. 그것에 관해 완벽하게 써낼 수 있는 날이 오리라는 것을 절대 믿지 마. 다만 네가 오늘 중얼거렸던,

빛 쪽으로 가자. 빛 쪽으로 가자. 그 절실함을 믿어. 그것만큼은 여기 있어. 네 문장 빛으로 갈 수 없어. 다만 빛 쪽으로 가자고, 가자고 중얼거리며 계속 향할 뿐이지. 나는 예전에도 쓰인 적 없고 앞으로도 쓰일 리 없는 문장이야. 너는 평생 나를 찾고, 사랑하고, 증오하겠지. 단 한 줄을 위해 시간과 노트와 잉크를 무용하게 낭비하겠지. 그래도,

용기를 가져.

중지손가락의 굳은 살과 가느다란 펜 심이 종이의 표면을 긁어나가는 느낌을, 손금 안에 고인 땀을, 종이를 물들게 하는 까만 잉크를, 지금 여기, 쓰고 있는 너를 믿어.

너는 평생 쓸모없는 글만 쓸거야. 네가 쓰는 그 어떤 글도 너를 완전하게 구원하거나 해방하지 못할거야. 너는 평생 그 햇빛 아래에서 따뜻하고 서글프다 외엔 별 다른 말을 찾지 못하게 될 수도 있어. 문장으로 쓸 수 있는 감정들이 불완전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불완전한 문장만을 쓰게 될거야.

그럼에도,

너는 결국 쓰는 걸 택했지. 끊임없이 너를 배신하고 비웃고 네 손틈새로 빠져나갈 문장들을 망연히 지켜보면서도 너는 지금 쓰고 있지. 결국 쓰고 있지.

앞으로도 네가 나를 찾아내 쓰는 날은 결코 오지 않겠지만, 누군가가 이미 쓴 문장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감격하고 애타하고 때론 질투에 미쳐 돌아버리겠지만, '소창다명 사아구좌' 작은 창문으로 쏟아지는 많은 빛들은 너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이겠지만.

어느덧 노트의 마지막 장이야. 빨리 다른 노트를 고르러 나가자. 빛 쪽으로 걸으면서, 네가 좋아하는 색 표지의 노트를 사고, 좋아하는 필기감의 펜을 사고, 영원히 쓸 수 없을 문장의 절망 주위를 맴돌며 어떻게든 이 텅 빔을 채워나가자.

완벽하지 않더라도, 완전하지 않더라도.
한 가지 확실한 건, 이건 전부 네 것이야.

안녕, 나는 아직 네가 쓰지 않은 문장이야
안녕, 나는 앞으로도 네가 쓸 수 없을 절망이야.
그럼에도 있지.
용기를 가져.

작가의 이전글 위로에 서툰 사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