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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윤 Jan 07. 2020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

내가 사람이긴 할까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

손미

사람이 죽었는데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 밤을 두드린다. 나무문이 삐걱댔다. 문을 열면 아무도 없다. 가축을 깨무는 이빨을 자판처럼 박으며 나는 쓰고 있었다. 먹고 사는 것에 대해 이 장례가 끝나면 해야 할 일들에 대해 뼛가루를 빗자루로 쓸고 있는데 내가 거기서 나왔는데 저것을 핥으면 갓 출산한 피 맛일 거다. 식도에 호스를 꽂지 않아 사람이 죽었는데 너와 마주앉아 밥을 먹어도 될까. 사람은 껍질이 되었다. 사람은 헝겊이 되었다. 그림자가 되었다. 연기가 되었다. 비명이 되었다 다시 사람이 되는 비극. 다시 사람이 되는 것. 다시 사람이 되어도 될까. 사람이 죽었는데 사람을 생각하지 않아도 될까. 케이크에 초를 꽂아도 될까. 너를 사랑해도 될까. 외로워서 못 살겠다 말하던 그 사람이 죽었는데 안 울어도 될까. 도망가도 될까. 상복을 입고 너의 침대에 엎드려 있을 때 밤을 두드리는 건 내 손톱을 먹고 자란 짐승이다. 사람이 죽었는데 이렇게 살아도 될까. 변기에 앉고 방을 닦으면서 다시 사람이 될까 무서워. 너에게 그런 고백을 해도 될까. 저 짐승이 나 대신 살아도 될까.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라고 묻는 사람이어도 될까. 사람이 죽었는데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 나무문을 두드리는 울음을 모른 척 해도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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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촌의 이름이 은혜가 아닌 은애라는 걸 29년 만에 처음 알았다. 크리스마스 다음 날 이모부가 돌아가셨고 1월 4일에 이모부의 딸 은애는 결혼을 했다. 은애는 결혼식장에서 쓰러졌다고 했다. 아무것도 못 먹은 탓에, 웨딩드레스의 코르셋이 허리를 너무 꽉 조인 탓에. 사진을 한 장도 못 찍었다 했다. 그래도 나중엔 활짝 웃었어. 은애의 결혼식에 다녀온 모친이 말해주었다. 나는 이모부의 장례식도 은애의 결혼식도 가지 않았다. 장례식와 결혼식은 울산에서 치러졌고 나는 먹고 사는 일이 바빴다는 변명을 한다. 사실 얼굴도 모르는 이모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보다도 더 와닿았던건 지금껏 은애의 이름을 은혜로 알고 있었다는 미안함이었다. 아니, 사실은, 미안하지 않았다. 은애는 내 이름을 알까? 나는 1년 전 개명을 했다. 은애는 내 나이를 알까? 나는 사실 은애의 나이를 잘 모른다. 은애는 나를 알까? 이름도 얼굴도 잘 모르는 사촌은 남보다 더 멀다. 나는 왜 이모부와 은애를 한 번도 보지 못했을까? 왜 모친은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과 그토록 오래 떨어져야만 했을까. 애인의 가족 모임에 얼떨결에 참석했을 때 이모가 넷이나 되어서 조금 부러웠는데 나는 왜 하나뿐인 이모의 이름이 순희인지 순자인지 헷갈릴까.

1월 1일은 여동생 생일. 여동생은 친구를 만나느라 이제 생일마다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 모친은 송구영신예배에서 밤을 새우고 부친은 타지에 있다. 애인은 새해에도 일하고 나는 방 안에서 홀로 무망하다. 모두가 따로따로 흩어져서 새해를 맞았다. 동생은 사람을 만나서 좋겠다. 모친은 기도를 할 수 있어 좋겠다. 나도 기도를 해도 될까? 사람을 만나서 사랑해도 된다고 허락을 구해도 좋을까.

다가오는 2월은 친구의 기일이다. 9년 전 2월에 죽은 친구의 장례식장에 나는 가지 않았었다. 가지 않은 이유는, 그 애도 나를 친구로 생각했을까? 우리는 고작 두세 번 만났을 뿐인데 장례식에 가도 되는 사이가 맞을까 고민하느라였다. 지금 같았으면 고민할 필요도 없었겠지만 그때 나는 20살이었고 그런 자리가 무서웠다. 이런 건 어떤 선생님도 알려주지 않았다. 스무 살은 이토록 무지한 나이다. 내가 그 애랑 얼마나 친했을까 관계를 재보는 동안 마찬가지로 그 애랑 두어 번 보았을 뿐인 애인이(당시에는 애인이 아니었지만) 그 애의 관을 들었다. 그러니까 두어 번 본 사람이 관을 들어야 하는 애였다. 그 애는. 나는 그 애와 둘이서 크리스마스를 보낸 적도 있었는데 왜 그 자리에 없었을까. 아는 언니가 내 얘길 듣고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죽어서 슬프면 장례식에 가는 거야. 내 핸드폰을 가지고 놀던 동생이 내가 그 애를 찍은 사진을 삭제했을 때 나는 울면서 처음으로 동생을 때렸는데 장례식엔 가지 않았다. 그 애를 위해 기도해보려 했는데 잘 안됐다.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

그저께 애인이 말했다. 우리의 좋았던 기억은 다 끝났다고. 이렇게 관계가 유지되는 것도 기적이라고. 나는 대답했다. 네가 나를 미워한다고 해도 할 말은 없어. 8년 전에 태어난 애인과 나의 관계가 8살을 못 넘기고 요절하면 장례식엔 누가 올까. 애인과 나 둘 중 누가 상주를 맡아야 하나. 나를 사랑하기는 하지? 애인에게 물었고, 사랑하는 사람이 날 괴롭혀서 어쩔 줄 모르는 상태야. 애인이 대답했다.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

오늘 아침엔 회사에서 예고 없이 회의를 했고 나는 1층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회의에 늦었다. 휴대폰엔 직장 동료의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었다. 새로 들어올 신입은 담배 피운대요? 회의 중에 다른 직장동료가 말했다. 내가 사람일까? 사람 아닌 것이 사람을 사랑해보겠다고 설쳐서 매번 이렇게 엉망이 되는 걸까? 친구가 죽을 땐 안 울었는데 친구의 사진이 삭제되니까 울고 이모부의 장례식에 가지 않고 은애의 이름을 은혜라고 알고 직장에서는 키보드 소리조차 무서워서 자꾸 어깨를 움츠리는 내가 사람일까. 나를 미워해도 할 말은 없다고 하는 내가 사람이긴 할까.

울면서 문을 두드리는 사람의 삶을 이해할 리 없다. 어렸을 적 내복만 입고 쫓겨났을 때 한번만 용서해 달라고 애원하지 않고, 그길로 곧장, 맨발로 집을 나갔다. 모친은 두고두고 이야기한다. 너는, 한번도, 용서해달라고 말한 적이 없다고. 사람이 죽었다고 울어본 적이 없다. 용서해달라고 빌어본 적이 없다. 죽었다고 잘도 글로 쓰면서 글로는 잘도 빌어먹고 용서를 구하면서. 슬플 때 울지 않고 글을 쓰는 것이 사람일까. 슬픔, 이라고 쓰면 슬픔이 내 것이 되나. 슬픔조차 내 것이 못 돼서 슬프다고 하면 누가 믿어줄까. 나는 화가 나거나 분노할 때만 우는데 그렇다면 나는 친구의 사진을 동생이 삭제했을 때 슬픈 게 아니라 화가 났던 걸까. 내가 그 애를 생각보다 많이 좋아했다는 걸 깨달은 건 그 애가 죽은 지 몇 년 후의 일인데 사진을 가졌다고 그 애가 내 것이 되나 슬픔이라고 쓰면 슬픔이 내 것이 되나 시를 필사하면 문장을 가질 수 있나 너를 자꾸만 자꾸만 쓰면 너를 가져볼 수 있나. 슬플 때 울지 않는 게 사람일까? 내가 울지 않는 건 살면서 엄마 아빠가 우는 것을 한 번도 못 봐서일지도 모른다. 큰 외삼촌이 죽었을 때도, 친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엄마 아빠는 내 앞에서는 한 번도 울지 않았잖아. 울지 않는 것조차 남의 탓으로 돌리는 내가 사람인가. 과연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 사람더러 보고 싶다고 말해도 되나. 이런 나라도 미워하지 말아달라고 울면서 문을 두드려도 될까, 다시 내쫓겨나면 그래도 될까, 문을 열어줄까, 문을 열어주지 않더라도 눈물 없이 말끔한 얼굴로 글을 쓰는 내가 사람일까.

살면서 몇 번 만나고 헤어져도 봤는데 이토록 무망감이 들 때는 아무도 못 만나고 아무하고도 헤어져보지 못한 기분이 든다. 예전 글에 사람의 모서리가 닳아 사랑이 된다고 쓴 적이 있는데 어쩌면 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인 척 하는 무언가라서 사랑이 없나.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

직장동료들과 웃고 떠들다가도 저 사람들이 나를 몇 달 전처럼 다시 나를 미워할까봐 두렵고 더 두려운 건 네가 나를 미워해도 어쩔 수 없지 라고 말하는 나 자신이다. 울면서 문 두드릴 줄 모르는 스스로가 가장 싫고 무섭다. 온갖 슬픔의 문장으로 빈 종이를 채워도 그 슬픔이 진짜 내 것인지 의심하는 내가 가장 두렵다. 나는 무망감, 희망 없음으로 가득차서 투명해진다. 오히려 너무 투명해서 내면이 없는 사람이 된다. 셀로판지처럼 얕은 두께의. 내가 좋아하는 시에서는 ‘투명하다는 말은 수상하다’는 구절이 나온다. 우는 척도 서투른 내가 사람인가.

글을 쓰는데 종이 위로 물방울이 툭툭 떨어졌다. 집으로 걸어올 때 비가 많이 왔었다. 젖은 발이 시려운 게 서러워서 눈물이 났다. 울면서 집에 왔다. 세수를 하니 다시 말끔한 얼굴이 되어 책상 앞에 앉았다. 울면서 문을 두드리는 슬픔을 모르면서 사람이 저마다 가진 문에 대해 글을 써보려 했던 내가 온전한 사람일까. 사람이 아니라면 이제부터라도 사람이 되어도 될까. 담배도 끊고 약도 열심히 먹고 잘 웃고 잘 울고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면 안 될까. 힘들 때 아무렇게나 기도하면 안 될까. 그렇지만 나는 고작 젖은 발이 시려워서 운다. 누가 태어나거나 죽거나 할 때는 눈물 한 방울 없이, 빤빤한 얼굴로 있다가 고작 젖은 발이 서러워서 운다. 이런 내가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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