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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윤 Nov 20. 2019

관계의 무게

사람은 잊히더라도, 우리가 함께한 순간은.

관계의 무게

다정이와는 딱 하룻밤 만나서 놀았다.

다정이는 내가 다니는 회사의 단기 아르바이트생이었다. 나는 한달 남짓 다정이를 보았을 뿐이다. 다정이는 퇴사하는 날 저녁식사에 우리 팀원들을 초대했다. 나는 내 일이 벅차 다정이에게 제대로 마음을 쓴 적도 없었는데 저녁식사 자리에 초대해줘서 고마웠다.

저녁을 먹고 술을 마시러 갔다. 술이 오르자 나와 다정이는 오랜 친구와도 나누기 힘든 내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분명 취기 때문이겠지. 이토록 섣부르게 깊어지고 다정해 질 수 있는 건. 다정이와 나의 관계는 오늘 밤이 지나면 끝나버릴 거라는걸 둘 다 은연중에 알고 있었기 때문일까. 모르는 사람에게 비밀을 더 잘 고백할 수 있듯이. 술기운에 깊은 속내를 실어보내자 어쩐지 마음이 가벼워졌다.

승현언니는 지금은 퇴사했다. 승현 언니의 송별회 날 역시 우리는 술을 마셨다. 나와 승현 언니와 하늬 언니는 흡연실에서 담배를 피우며 울었다. 승현 언니와 일했던 5개월간 나는 언니와 채 열마디도 나눠보지 못했다. 그런데 어째서 눈물이 나왔던 걸까. 술에 취한 하늬언니가 자신의 우울증 병력을 고백하며 승현언니에게 안겨서 울었을때,

나 역시 나도 모르게 내 오랜 악우인 병과 지금도 진득한 가래처럼 내게 달라붙어 있는 지난한 우울에 대해 고백했다. 그러자 승현 언니가 울면서 말했다.

하늬야, 소윤아. 죽고 싶을 땐 내 생각을 해. 너희들이 죽으면 정말 슬퍼할 사람이 나라고 생각해. 나는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

위로는 낯선 곳에서 온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 지구 반대편에서 나를 위해 기도하는 것처럼.

아침이 왔을 때 다정이와 승현 언니는 내 삶에서 없었던 사람처럼 사라졌다. 핸드폰 번호도 교환하지 않았다. 우연이 겹치고 겹친다면 모를까, 그들을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만 같다. 그럼에도 다정이와 웃던 밤, 승현언니와 울던 밤은 잊히지 않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내게 관계가 아닌 장면으로 기억된다. 깃털만한 무게를 가지고, 다음날 어디론가 사라져버려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의 기억. 기억의 사람.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지만 옷깃조차 스치지 못하고 그저 멀어진 연들이 많다. 둘도 없는 사이처럼 안아주다가도 지금 떠올려보면 돌연 어색해지는 사람들이 있다. 그 순간의 기억은 너무도 친밀한데 막상 그 사람과의 관계를 놓고 보면 어색해서 어쩔 줄 모르게 된다.

선을 긋는 일과 넘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나도 애인도 누군가에게 곁을 잘 내어주지 않는 타입이다. 애인에게 내가 말했다.

예를 들면, 여기까지. 라고 그어 놓은 선이 있잖아. 근데 그건 나만의 선인거지 다른 사람들은 거기에 선이 있는 지 모르잖아. 그러니까 우리는 짧은 순간에 서로의 선을 넘어버려도 넘은 줄 모르게 되는 거 아닐까? 짧은 순간이지만 벅찬걸 나누게 되는 경험이 있잖아.

내가 사람들을 만나는걸 좋아하지 않았던 건, 늘 술자리를 피했던건 그들과 헤어져서 돌아오는 길이 지나치게 혼자여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다정이와 승현언니가 무엇을 하며 지내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어도 헛헛한 기분이들지 않는다. 지금껏 좁고 깊은 나의 세계, 좁고 깊고 견고한 관계들이 전부라고 알고 살아왔다. 어쩌면 나는 나를 둘러싼 관계들이 내 안으로 좀 더 깊이 들어올 수 있도록, 가라앉을 수 있도록 무거운 돌을 매달아 놓았던 건 아닐까, 잡지 못한 연. 자연스레 떠나가버린 연에 집착하고 그 순간의 좋았던 기억들까지 폄하해버리는 건 '관계'를 너무 무겁게 생각한 나의 실수는 아니었을지.

지금은 여기 없는 사람들,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사람들. 그러나 어느 밤, 내 선을 불쑥 넘어와 깃털 하나를 흘리고 간 사람들. 이제 나는 그 깃털을 모아 날개를 만들 것이다. 날아가도 좋다. 멀리 날아가도 허망해하지 않고 헛헛해 하지 않고, 그이가 조각이라면 조각만으로도 남아있을 수 있게, 애써 관계를 완성하지 않아도  꽃잎같은 한 점 기억만으로 충만해 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목이 긴 초식동물처럼, 그들에게 수줍게 인사해야지. 지평선 너머로 사라졌지만 매일 같은 시간에 저녁 노을이 지는 것을 계속 바라보는 마음으로 기억할게. 지금 나를 둘러싼 관계들을 지나치게 가볍게, 그렇다고 너무 무겁게 받아들이지도 말고 담담하게, 돌이켜보면 모든 시절이고 다 좋았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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