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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윤 Oct 23. 2019

미래의 책

모든 책이 가지고 있는 저마다의 온기


좋은 기회가 닿아, 투고한 글을 잡지에 실을 수 있게 되었다. 노트나 한글파일에만 쓰이던 글을 지면에서 만나면 어떤 기분일까? 사뭇 기대가 된다. 책은 지금도 여러 사람들의 노력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운이 좋게도 내게는 글을 실을 '지면'이 몇 번 주어졌다. 학교 졸업작품 문집이라거나 어쩌다보니 타게 된 대학문학상의 수상작품집, 문예지에 실린 글. 노트나 한글파일에 쓰인 글들은 금방이라도 꿈틀거리며 사라지거나 나보다 더 먼 곳으로 훌쩍 떠나버릴 것 같다. 지면에 나와 가지런하게 교정된 채로 도열해 있는 글들은 어쩐지 조금 뻔뻔한 얼굴을 하고 있다. 나는 그 잘 정련된 글들이 마치 누구를 속이는 것 같아서 내 글이 실린 지면은 잘 보지 않는 편이다. 조금 어색하고 많이 부끄럽다. (매일 평범하고 편한 옷만 입고 운동화만 신고 다니다가 처음으로 격을 갖춘 정장에 구두를 신은 모습을 본 기분이랄까)

그와는 별개로 나는 책을 좋아한다. 나는 도서관 바로 앞집에서 살았다. 구립도서관의 어린이 열람실에서 유년을 보냈고 지금도 특별한 일정이 없으면 자전거를 타고 도서관에 간다. 무시무시한 모친과 하나님이 교회에 가라고 겁박할 때도 교회에 가는 척 하면서 도서관에 갔다. 고등학생 때 한창 방황하며 등교거부를 할 때도 도서관에 가서 김수영 전집을 읽거나 광화문 교보에서 선 채로 단편소설 하나를 다 읽고 핫트랙스에서 포티쉐드의 음반을 들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책은 내게 가장 흥미롭고 신뢰할 수 있는 매체다. '책'이라는 단어 자체에 깃든 무게감과 신뢰감, 때로는 묘한 경외감. 그것을 배반하지 않기 위해 작가들은 오늘도 번민 속에서 글을 썼다가 지우다 반복하겠지. (깊은 존경을 보냅니다.)

작년 여름에는 출판학교에서 책 만드는 법을 배우고 직접 한 권의 책을 만들어보기도 했다. 책을 만드는 일은 형체 없는 원고(글), 즉 생각에 물성을 부여하는 일. 누군가의 머릿속에나 수첩 안에서는 그저 몽상이나 공상으로 남았을 지도 모르는 투명함에 몸을 부여하는 일. 그렇게 생각하니 책이란 누군가의 신체 혹은 장기같아, 어떤 책은 뇌, 어떤 책은 심장, 어떤 책은 눈, 어떤 책은 손... 때로는 온기마저 느껴지는 것이다. 가끔은 누군가의 생각을 만지고 싶어질 때, 나는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조심스럽게 손을 뻗는다.

어쩌면 나는 애독가이기보다는 애서가, 혹은 탐서가일수도 있겠다. 읽는 행위보다 책 그 자체의 질감이나 감촉, 느낌을 더 사랑하는. 책에 절대 밑줄을 긋지 않고 양장본의 커버는 물론 띠지 하나도 함부로 버리지 않는다. 가장 좋아하는 감촉의 책은 '읻다'라는 출판사에서 나온 미즈노 루리코의 <헨젤과 그레텔의 섬>이라는 시집이다. 표지를 쓰다듬으면 벨벳을 만지는 것처럼 부드럽다. 시집에 실려있는 시 역시 고운 벨벳처럼, 어린 시절의 애착 어린 담요처럼 보드랍고 작은 슬픔을 준다.

'그렇게 짧은 여름의 끝에 그이는 죽었다
그것은 작고 투명한 유리잔같은 여름이었다
하지만 그런 여름을 사람들은 사랑이라 부르는 듯 했다'

문학과지성사 시인선의 캐리커쳐도 좋다. 시인의 얼굴. 누군가의 얼굴 안으로 걸어들어가다보면 어느 순간 맞닥뜨리게 되는 막다른 길, 더는 나아갈 곳 없는 벼랑. 그런 얼굴들을 포착해 그려놓은 것 같다. 내 방 책장에 일렬로 꽂혀 있는 문지의 시인선들을 보면 어쩐지 든든하다.

출판학교에서 만나 함께 책을 만들고 나누던 친구들은 지금 책 만드는 사람이 되어 있다. 책을 만드는 일에 낭만을 가지면 안돼요. '로맨스는 별책부록'이 사람들을 다 망쳐놨어! 만나면 볼멘소리부터 내뱉지만 그 친구들과 마지막으로 들르는 곳 역시 서점이다. 그들에게는 업이겠지만 탐서가로서 책의 물성을 가장 잘 아는 이들과 서점에 가는 건 퍽 즐겁다. 이리저리 꼼꼼히 종이를 넘겨보고 책 표지를 만지작거리는 친구들을 나는 동경의 눈으로 바라본다.

요새의 책들은 양장본보다는 반양장이나 소프트커버가 대세, 국판처럼 다소 큰 사이즈보다는 신국판 변형이나 문고본처럼 손에 들고 다니기 가볍게 작아지는 추세라고 한다. 그러고보니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을 좋아하는 이유도 그 특유의 늘씬하고 길쭉한 판형 때문일지도. 사람들이 점점 단문을 선호하는 이유는 폐활량이 줄어든 것과 연관이 있다고 한다. 글은, 책은 우리의 손과 숨에 밀접하게 닿아있다. 책을 읽으면 누군가와 눈을 마주치거나 누군가의 숨을 대신 쉬거나 손짓을 훔치는 기분이 드는 게 전혀 이상한 일만은 아닌 것이다. 나는 운이 나쁘게도 책과는 아주 거리가 먼 일을 하느라 책 읽을 시간을 전혀 못 내고 있지만 오늘 밤에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서문이라도 읽고 자야 할 것만 같다.

'앤 드루얀을 위하여
공간의 광막함과 시간의 영겁에서
행성 하나와 찰나의 순간을
앤과 공유할 수 있었음은 나에게는 하나의 기쁨이었다'

단 세줄의 문장으로도 우주는 태어난다.

조금 어색하고 많이 부끄럽다고 썼지만 그래도 두근두근, 내 글이 책으로 나온다는 건 어쩔 수 없이 설레는 일이다. 겨울이 오면 내 손에 쥐어질 미래의 책은 어떤 온기를 띄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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