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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윤 Oct 23. 2019

어색한 사람

인간을 연습하는 인간


글보다는 일기를 쓴다는 기분으로 책상 앞에 앉았다. 진짜 일기는, 쓸 수 없으니까 언제나 언제까지나
일기를 쓰는 기분으로.
'기분'이라는 말은 영 신뢰가 가지 않는다. 인터넷에 떠도는 글 중 '기분이 태도가 되지 말자'라는 문장에서는 꽤 느낀 바가 있었다. 나는 요새 태도는 없고 기분만 있는 느낌이다. 인간으로 살아가는 기분. 기분을 지우고 그 자리에 태도를 넣으면 그것에 관해 쓰인 수많은 저작들과 고전들, 위대한 현자들의 글을 읽을 수 있다. 그러니까 인간으로 살아가는 태도에 관하여 내가 굳이 할 말은 없다.
나는 매일 인간으로 살아가는 기분이다.
그건 몹시 어색한 기분이다.

모든 것이 어색하다. 밤 11시에 잠들어 아침 7시에 일어나고 아침으로 미숫가루를 타먹는 것, 느적느적 움직이다 결국 8시 30분에 집을 나서는 것, 사무실에 들어가기 전 담배 한 대, 영혼 없는 인사.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나는 인사를 중얼거린다. 받으면 받는 거고 안 받으면 마는 거고. 절반 정도는 인사를 받고 절반은 피로에 절은 얼굴로 지나간다. 나는 책상에 앉아 가방을 걸 때까지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중얼거린다. 인간의 말을 처음 배운 유령처럼.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대부분의 유령에게는 얼굴이 있다.
몸도 있고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신다.

인간이되 인간 연습을 하는 사람들은 어딘가 모르게 어색해서 눈에 띄게 혼자가 될 때가 간혹 있다. 힘든 건 없지? 소윤이가 워낙 조용조용하게 다니니까 과장님께서 걱정이 많으셔. 선량한 지혜 주임님. 내가 조용조용하다고? 은이랑 만날 때는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떠드는데, 그렇지만 역시 요새들어 부쩍 말수가 줄은 것 같기는 하고, 사실은 모르겠다. 내가 말이 많은 사람인지 조용조용한 사람인지. 어느 쪽이든 연습이 덜 된것 같고 어색하다. 나는 어쩔 줄 모르는 기분으로 면담을 끝낸다. 이번에도 다만 기분이지.

점차로 투명해져서 이제는 사람들의 눈빛이나 말, 감촉이나 향기같은 것들이 내게 닿지 않고 내 몸을 투과한다. 닿을 수 없는, 셀로판지 인간. 한없이 투명해 내면 같은 건 도통 없을 것 같은 인간. 곧 희박해질 인간.
솔직하게 말하고 싶지만 내 마음은 벽인 척 하는 문이라 대체로 나조차도 문이 있다는 걸 잊는다.

휴일에는 향기나고 곱고 아름답고 쓸모없는 것들을 보러간다. 팬시점이나 소품샵, 팝업스토어, 잡화점들을 돌아다니면서. 내가 이런 것을 좋아했던가? 언제부터 좋아했었지? 사실은 내가 좋아하는(좋아한다고 믿는) 것들이 연습의 결과였다면? 내가 아름다운 것을 좋아한다고 믿고 연습하고, 은을 좋아하려고 치열하게 연습해온 거라면?

나는 아무것도 사지 않거나 가장 쓸모 없는 것을 산다. 잘 다듬어진 돌멩이에 광을 내고 색을 입힌 반지 같은 것들.
돌멩이는 천연덕스럽게 원석인 척, 반지 위에 올라와 있는 게 어색하지 않은 척 한다.
운이 좋은 돌멩이. 이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반지입니다!
내가 저 돌멩이라면 대담하게도 반지인 척, 세상에서 단 하나뿐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평생을 살아갈 수 있을까.

인간, 삶을 연습한다는 것을 들키면 안된다. 들키는 순간 멸시당한다. 어딘가 결여된 인간이라는 소문이 난다. 그러나 인간되기에 실패한 어색한 부분이 조금씩 드러난다. 예컨대 자꾸
눈에 띄게 혼자가 된다거나
기분이 태도가 된다던가
덜 태어난 것 같다던가

대학 전공 수업 시간에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태아가 모친의 산도를 빠져나올 때는 스스로의 어깨를 빼면서, 탈골시키면서 나온다고. 신생아들은 몸이 유연해서 의사가 태아를 들고 엉덩이를 찰싹 때리는 순간 몸을 뒤틀며 스스로 뼈를 맞춘다고.
그 당시에는 흘리듯 지나갔지만 몇년 후 생각이 나서 태아, 어깨, 탈골, 출산 등의 키워드로 구글링을 해봤을 때 관련된 정보는 나오지 않았다.
내가 잘못 들은 걸 수도 있다. 꿈에서 들은 수업일 수도 있다. 같이 수업을 들었던 동기에게 이 얘기 기억나지 않아? 라고 물으면 뭔 소리야? 라고 대답할까봐 몇년 째 이상한 비밀로 감춰왔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게 태어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위로할 때 어깨를 두드리는 이유를 단번에 알게 된다.
모든 사람은 태초부터 접골의 능력이 있으니, 얼굴뼈를 스스로 맞추고 다시 표정을 짓는 거야. 어색하지 않게.
그러나 나는 자꾸 어깨가, 내가 스스로 빼지 못한 어깨가 아직도 어두운 저 편에 걸쳐져 있는 것 같다.
아직 다 태어나지 못한 것 같다.
그래서 누군가 나의 어깨들 두드린다면, 그이는 깜짝 놀라겠지.
영원한 어둠을 두드리는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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