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과 시간을 갖기로 했다. 기약은 없다. 앞으로 어떤 시간을, 얼마나 긴 시간을 건너야 하는 지는 우리도 모른다. 다만 그렇게 이틀이 지났다. ⠀ 사랑에 물성이 있다면, 손에 잡히고 어루만질 수 있다면 나는, 사랑을 두 손으로 귀하게 받아 들고선 깨끗하고 따뜻한 물에 잘 씻길 것이다. 곱고 향기 나는 옷을 입히고,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포근하고 푹신한 이불을 내와 턱 끝까지 꼼꼼히 덮어준 후 한 잠 잘 재울 것이다. ⠀ 많이 낡았으리라. 사랑은 그간, 많이 고단했으리라. ⠀ 낡고 다 닳아버린 사랑을 저 깊은 곳에서 꺼내어 본다. 너 거기 있었니, 라고 말을 걸어보고 싶다. 너무 깊은 곳에 숨어 있어서 있는 줄도 몰랐다. 낡은 만큼 익숙한 기억들이 많다. 함께 걷던 종로3가와 5가의 숱한 골목들, 말하는 모든 것들이 노래가 되고 잘 못 들은 오해가 시가 되고 눈길이 닿는 곳마다 빛이었다. 8년 간 지겨울 만큼 드나들었던 골목의 길을 나는 다 알지 못한다. 나는 늘 누군가의 옆얼굴만을 보며 걸었다. 그 얼굴에서 세상의 모든 빛이 다 나오는 것 같았다. 그럴 때 사랑은 미완성된 지도의 모양으로 내게 다가와 펼쳐진다. ⠀ 우리는 사랑을 하고, 스스로의 보잘 것 없는 생활을 돌보고, 그 생활에서 패배한 뒤에 서로를 찾았다 사랑을 나눈 후 연인은 언제나 그 공간에서 가장 시원하고 맑은 물을 한 컵 따라 내게 가져다주었다. 나는 늘 그 물을 달게 받아마셨다. 두 손으로 컵을 꼭 쥐고, 한 방울도 남김없이. 그때의 사랑은 투명한 유리컵 모양이 된다. 내 열 손가락의 지문이 모두 다 찍혀있을 것이다. ⠀ 애인은 자신을 감정쓰레기통으로 이용해선 안 된다고 내게 질책했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한 집에 있어도 각자 다른 방에서 잠들었다. 애인이 잠든 방에 가보면, 애인은 늘 따뜻하고 푹신한 이불은 나를 주고 자신은 얇은 이불 하나를 몸에 돌돌 말고 잠들어 있었다. 애인에게 내 이불을 덮어준 적이 있었나? 웅크린 채 만들어 있는 그 몸 위에 무언가를 덮어준 적이 있었나? 그럴 때 사랑은 낡고 구겨진 이불 모양이 된다. ⠀ 잠든 애인 대신, 애인의 강아지들이 내게 다가와 몸을 붙이고 잤다. 체온을 가진 것들, 체온을 옮겨주는 것들, 작고 어린 것들을 함께 돌본다는 감각이 소중했다. 사랑이 확장되는 기분이 들었다. 둘만의 것이 아니라 저 어린 것들의 것이기도 하구나. 그럴 때 사랑은 살을 가진, 살아 움직이는 흰 털뭉치가 되고. 산책을 나갈 때마다 내가 잘 오고 있나 뒤를 돌아봐 주기도 하고. ⠀ 어두워져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제 나는 몇 번이고 속으로 다짐한다. 무기력해지지 않을 것이다. 무력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자꾸만 ‘믿음 의상실’을 ‘믿음의 상실’로 읽는다. 연인은 내가 썼던 글 한 구절을 그대로 읊는다. 네가 어디까지 관대해질 수 있는지, 어디까지 용서할 수 있을지 시험당하는 느낌이었다면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저녁까지 불이 환한 공방의 이름은 ‘키리에’다. 키리에.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로 시작하는 기도문. 키리에, 키리에. 그럴 때 사랑은 어두운 길 위에서 작고 선연하게 빛을 내뿜는 작은 간판이 된다. 나는 불 밝은 간판의 이름을 몇 번이고 되뇌면서 걷는다. 키리에 공방이 나오면 집은 곧 금방이야. 돌아갈 수 있어. 돌아갈 수 있어. 몇 번이고 새긴다. 다시 돌아갈 수 있어.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 가장 위로가 됐던 건 사르트르가 남긴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말이었다. 나는 한 줄의 감성으로 사람의 표면만을 얄팍하게 만지려드는 문장보다는 차라리 타인은 지옥이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사르트르에게 더 위로받았다. 그럴 때 사랑은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문장 하나로 까맣게 남는다. 지난 8년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내게로 틈입하려 밀고 들어올 때, 마침내 그이가 내 안에서 나를 넘어설 때, 열린 댐처럼 그이가 범람할 때. 그 이질감을 지금껏 어떻게 견뎌온 걸까. 그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우리는 늘 그 지옥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도모하곤 했다. 서로라는 지옥에서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 했다. 그것만큼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 ⠀ 때로는 손가락 끝이나 입술 위에 심장이 있다고 믿었다. 내 몸의 가장 끝 부분, 다른 사람과 닿을 수 있는 가장 첫 부분. 그곳까지 박동이 전해졌으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닿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부분이었으니까. 언제부턴가 손을 잡지 않고 입술을 맞대지 않으니 심장은 몸의 가장 깊은 곳으로 숨어들었고 사랑 역시 보이지 않게 되었다. ⠀ 다음 생에는 사람이 아닌 사랑으로 태어나게 해줘. 사람은 누구나 지옥을 품고 있으니 사람이 아닌 사랑으로 태어나 온전히 사랑만 할 수 있게 해줘. 나는 사람이 아닌 사랑을 믿는다. 다 낡아버린 사랑을 믿는다. 내 안으로 숨어든, 서로의 가장 깊은 곳으로 숨어든 사랑을 믿는다. 보이지 않으므로,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마음을 신앙이라 부르며. 각자의 가장 깊은 곳에서 분명 찾아낼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 다시 한 번 찾아내리라. 어떤 모양을 하고 있던 사랑을 찾아내리라. 나는 미완성 지도를 펼친다. 그리고 그 위에 다시 두근거리는 손가락으로 길을 찾아 그린다. 그럴 때 사랑은 아무것도 없는 흰 백지. 나는 누군가에게, 로 시작하는 편지를 적는다. 그럴 때 사랑은 아직 쓰이지 않은 문장. 아직 내뱉지 않은 말. 아직 세상에 없기에 모든 가능성을 다 가진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