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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윤 Feb 18. 2020

위로에 서툰 사람

슬픔은 멈추지 않을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년 전의 일이다. 함께 글을 쓰는 친구들과 카페에서 만났다. 그 중 한 친구가 몹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지금도 그 고통을 가늠할 수 없다. 친구는 내내 울음을 참고 있었지만 온 몸이 눈물로 이루어진 사람 같았다. 끝내 친구가 내 어깨에 기대어 울음을 터트릴 때, 나는 완전히 얼어붙고 말았다. 나와 친구의 맞은 편에 앉은 다른 친구가 내게 말했다.

너 태어나서 위로라는 걸 처음 해본 사람 같아.

나는 위로에 서툴다. 내 생각에 내 위로는 매번 실패로 돌아가는 것 같다. 타인의 슬픔과 고통 앞에서 나는 언제나 예의 '위로라는 걸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사람'이 된다. 슬픔이라는 걸 처음으로 목격한 사람 같다. 하긴 제각기 품은 슬픔의 결이 모두 다르니, 모든 슬픔은 언제나 처음 보는 슬픔이다. 소설이나 영화의 인물이 겪는 슬픔을 다룰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어느 정도 편집되고 가공된 슬픔은 내게로 그 감정이 전이되기까지 한다. 함께 울고 몇 마디 덧붙일 수도 있지만 지금 여기 내 어깨 위로, 내 몸으로 육박해오는 날 것의 슬픔과 눈물 앞에서 나는 얼음이 되고 만다. 내가 그 때 그 친구에게 울지 말라는 말을 했던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내가 과연 할 수 있었을까? 타인의 슬픔 앞에서 최초로 느끼는 감정이 위로에 서투른 내 자신을 향한 불안감과 당혹감이라니. 나는 비겁한 인간이다.

그렇게 살다보니 내 앞에선 아무도 울지 않는다. 그 친구의 울음 역시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모친도, 부친도, 동생도, 애인도, 내 앞에서 울지 않는다. 타인의 눈물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본 것 외에는 낯설다.

누군가는 날더러 다른 사람이 어려워 하는 일을 단번에 해내는 사람이라고도 한다. 산적해 있는 문제 앞에서 간명하게 해결책을 제시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나는 위로에 서툴어서 언제나 문제와 감정을 해결하고 해소하는 쪽으로 대화를 이끌었다. 생각의 선후를 바꿔봐. 네가 그런 생각을 해서 우울한 게 아니라 우울하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거고 우울함이 사라지면 그런 생각도 멈추게 돼. 우울할 때는 심호흡을 크게 하고 물을 자주 마셔. 조금 뛰면서 각성된 머리와 몸의 밸런스를 맞추면 더 도움이 될거야. 일단 시도해보자. 병원에 가서 약을 타오자. 나도 약을 먹는데 도움이 많이 되더라.

모두들 내게 고맙다고 했다. 너는 현명한 사람이라고도 했다. 그리고 다시는 내 앞에서 울지 않았다.

소통과 이해의 가능성보다는 불가능성을 더 믿는 편이다. 마음을 나누는 순간에 우연찮게 작은 공명이 있을지언정 타인의 고통과 감정을, 상황을 온전히 내 것처럼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에 관해서는 회의적이다.

이 회의감에 대해 깊이 생각한 듯한 소설을 한 편 읽게 되었다. 아직 책으로 나오지 않은 따끈따끈한 원고라 말하기엔 조심스럽지만, 간략하게만 이야기하자면, 타인의 경험을 구입해 그 당시의 상황과 그 상황 속에서 느껴지는 감각과 감정을 온전히 내 것처럼, 실제처럼 대리 체험을 할 수 있는 근미래의 설정을 담은 SF 소설을 읽었다. 지독하게도 불행한 삶을 살던 주인공은 타인의 행복한 경험들을 구매해 대리 체험을 하는 것을 위안삼아 살아간다.

어떤 사람이 연인과 보낸 행복한 경험을 반복적으로 구입해 대리로 체험하던 주인공은 급기야 그 기억 속의 연인을 실제로 만나 사랑하기를 욕망한다. 주인공과 기억 속의 연인의 만남은 의외로 쉽게 이루어진다. 그 연인 역시 실제가 아닌 가상현실 속의 아바타이기 때문이다. 타인의 기억 바깥에서 만난 아바타 연인은 감흥 없이 틀에 박힌 대답만을 반복할 뿐이다. 아바타 연인과의 만남을 종료한 주인공은 기억의 주인에게 묻는다.

당신은 이 뻔한 시뮬레이션 속에서 어떻게 그런 긍정적인 감각과 에너지를 만들어 낼 수 있었나요?

기억 속 시뮬레이션의 주인은 대답한다.

제가 당신에게 판매한 경험은 모두 똑같은 순간을 수십, 수백 번 경험한 이후 길어낸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랍니다. 저는 당신을 위해 같은 순간을 수십, 수백 번 씩 반복했어요.

한 사람을 위해 순간 속에서 영원을 살며 수많은 희노애락의 경우의 수를 딛고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발견해내려는 시도. 비록 아바타 연인과의 소통은 실패로 끝나더라도, 위로가 닿지 않더라도 어쩌면 사람이 사람에게 가장 위로받는 지점은 끝없이 위로하려는 시도 그 자체가 아닐까.

많은 사람들이 소통과 이해의 불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반복한다. 그러나 그만큼 그것을 시도해야 한다는 이야기 역시 계속 된다. 내가 '울지 마'라고 했을 때 거짓말처럼 울음을 그치길 기대해서는 안 됐다.

울음이 멈추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울지 말라고 해야 했다. '알더라도'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 수 백번 수 천번 위로를 건네더라도 슬픔이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어떤 슬픔은 한번의 위로만으로 결코 끝나서는 안된다 것을 알면서도 위로해야 했다.

위로하는 사람은 위로를 잘 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 슬픔이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도 끝내 위로하는 사람이다. 누군가의 한 순간을 위해 수백, 수천번 반복되는 영원을 사는 경험의 주인처럼.

아마 내가 지금 당신의 슬픔 앞에서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일생을 다 걸어도 당신의 슬픔을 완전히 내 것처럼 받아들이기는 불가능하다는 것 뿐이겠지. 지금까지는 그 서글픈 불가능성이 두려워 울지 말라는 말 한번 건네보지 못했지만, 내가 수 백번, 수 천번을 홀로 중얼거려봤자 당신의 슬픔이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지만,

다 알면서도.

네가 울지 않았으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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