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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윤 May 15. 2023

생일과 기일

비로소 어깨 위로 빛이 내려앉을 때

5월 14일은 내 생일이다.     


생일이 되면 나는 늘 우울했다. 우울은 천성, 내 오래된 친구였지만 그날만큼은 더욱 농도 짙게 몸을 부풀렸다. 언젠가 엄마는 생일날 내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태어나고 싶지 않았을 텐데, 널 괜히 낳아서 미안하다.” 나는 그 말에 소리 내어 대답하진 않았지만 속으로 동의했다. 맞아, 사실은 별로 태어나고 싶지 않았는데.     


매년 생일마다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가족들끼리만 조촐하게 말없이, 생일 케이크를 먹었다. 김행숙의 시처럼 우리 가족은 케이크처럼 모여 있었다. 우리가 너무 가까워서 우리 사이를 지나갈 수 있는 것은 칼뿐이라는 듯이. 정확히 네 조각 난 케이크, 아무 말 없이 먹으면서.     


생일이라는 게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생일날 죽을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그렇다면 그날은 내 생일이 아니라 내 기일이자 몰일歿日로 기억될 테니까. 나는 삶보다 죽음에 가까웠고, 태어남보다는 죽어감에, 살아짐보다는 사라짐에 더 가까운 사람이었다. 때로는 아직 덜 태어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태어난 게 아니라 낳음당한 것 같았다.     


대학 시절 아동문학 수업에서 교수님이 이런 일화를 말해주었다. 모든 태아는 산도를 빠져나오는 순간 자기 어깨를 비틀어서 어깨뼈를 뺀다고. 그래야 어깨가 산도에 걸리지 않고 나올 수 있다고. 그리고 태어난 직후 엉덩이를 맞는 순간 몸을 비틀며 자기 어깨뼈를 다시 맞춘다고.     


우리는 모두 스스로 어깨뼈를 빼고 나오는 고통을 겪으며 태어난 사람들이니 삶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위로할 때 어깨를 두드리는 이유를 알 수 있게 된다. 최초의 상처는 태어날 때 어깨에 얻는 것, 우리 모두에게 존재하는 뼈의 기억. 그렇지만 나는 도저히 어깨뼈를 스스로 뺄 자신이 없어 어둠 속에서 헤매는 사람인 것 같았다. 언제나 어깨가 반쯤 산도의 어둠 속에 걸쳐져 있는 것 같았다.      


32번째 생일이다. 사회생활을 한지 이제 6년 정도 되었고, 그동안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이상한 사람 많은 사람을 지나왔다. 다행히 이제 내 옆에는 정말 좋은 사람들만 남아 있어 분에 넘치는 축하를 받았다. 문득 담배를 피우다가 눈물이 핑 돌 정도로, 한때 없으면 죽을 것 같았던 사람하고는 영영 연이 끊어지고, 다시는 못 만나겠지 생각했던 친구와는 10년 만에 다시 만나 곱창을 구워 먹는다. 인연이란 언제나 예측 불가능한 것, 그래서 귀하고 소중한 것.     


이제 더는 생일에 죽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비로소 완전히 태어난 느낌이다. 이제야 나는 어깨를 바깥으로 뺄 용기를 얻게 되었다. 바깥으로 나온 어깨 위로 빛이 내려앉는다. 동생이 사다 준 케이크는 눈물이 날 정도로 맛있었다. 가족들이 그 자리에서 한판을 다 해치웠다. 우리는 이제 케이크를 조각내지 않고 숟가락으로 퍼먹는다. 우리 가족의 사이에는 이제 더 이상 칼이 지나가지 않는다.     


당신이 내게서 사라진다면 죽어버려야지, 생각했던 터널을 지나 지금 막 나왔다. 나는 이제 당신이 없어도 잘 살 수 있다. 뒤는 돌아보지 않는다. 생일 초를 불면서 나는 앞으로 나아간다. 모든 사람의 축하가 담긴 생일 초가 내 앞을 밝히는 등불이 될 것이다. 생일 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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