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의 미학
나는 들에 핀 꽃을 좋아한다.
울타리 너머, 아무도 가르치지 않은 그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피어난 꽃들.
그 꽃은 계절이 허락해야만 피고, 나는 그저 기다리는 일 외엔 할 수 없다.
꽃은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나는 안다.
그 피어남이 얼마나 절묘한 타이밍인지, 그 기다림이 얼마나 고요한 인내였는지를.
그래서 나는 꽃이 피기를 잠자코 기다린다.
보게 된다면 그것은, 꽃이 나를 허락해 준 순간이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했다.
“난 꽃을 더 빨리 피우게 해.
물을 며칠 주지 않으면, 식물이 위기감을 느끼고 꽃눈을 틔우거든.”
그 말을 듣고 나는 마음이 조금 불편해졌다.
그가 틀린 말을 한 것은 아니다.
식물학적으로 맞는 이야기일 것이다.
하지만 그가 꽃을 대하는 태도는 사람을 기다리는 연인이 아니라, 폭군처럼 보였다.
그에게 꽃은 피우게 만드는 것이고, 나에게 꽃은 피어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었다.
나는 문득 묻는다.
사람은 자기를 어떤 존재라고 생각하며 사는 걸까?
자연이 뜻을 정하기도 전에 인간은 시간을 앞당기고,
성장을 조절하며, 결과를 예측하려 든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세상의 중심이었고,
자연을 이해하려는 대신 조정하고 해석하고 설명하려고만 했다.
우리는 모든 것에 손을 뻗는다.
햇살의 양도, 물의 양도, 바람의 방향도 계산해서 다듬는다.
그러나 들에 핀 꽃은 말한다.
“나는 피고 싶을 때 핀다.”
꽃이 사람에게 허락을 받지 않듯,
사람 또한 모든 것에 손을 대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자꾸 '지금' 보려고 하고, '내가' 피우려 한다.
꽃이 피기까지는 시간, 계절, 햇살, 뿌리의 힘, 흙의 기억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연의 리듬이 필요하다.
그 리듬을 무시하고 빨리, 더 빨리, 지금 이 순간에
결과를 보고 싶어 하는 인간의 마음엔 언제나 조급한 주권의식이 있다.
마치 우리가 모든 것을 움직일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나는 다시 묻는다.
사람은 자신을 누구라고 믿고 있는 걸까?
꽃의 시간을 앞당기는 것을 능력이라 여기고,
꽃의 고요한 기다림을 비효율이라 부르는 세상에서,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빼앗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다.
자연은 주인이 없고, 시간은 순응의 대상이며,
꽃은 부르면 오는 존재가 아니다.
나는 오늘도 들길을 걷는다.
어딘가에 피어 있을지도 모를 이름 모를 꽃을
사진에 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존재를 마주하기 위해서.
그 꽃이 나를 허락하지 않으면 나는 그냥 걷기만 할 것이다.
꽃은 아름답다.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피어났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