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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슬기 Aug 06. 2022

엄마가 내게 킹받는다고 하셨다.

쉰일곱 엄마에게도 신조어를 알 권리가 있다

  도서관에 다녀와 점심에 비빔밥을 해 먹으려고 했다. 분명 3일 전에 내가 꽈리고추와 멸치를 넣고 맛있게 볶았는데 꽈리고추를 두 묶음이나 넣었는데도 그 녀석들이 다 어디론가 도망가버렸다. 나는 옆에서 묵주를 쥔 엄마를 보고 말했다.


  “엄마. 이거 꽈리고추 누가 다 먹었어? 얘네 다 어디 갔어?”

  “아빠가 다 먹었을 걸?”

  “아 진짜로? 아···. 진짜 킹받네··· 나도 먹고 싶었는데.”


  나는 킹(King) 받는다고 말한 뒤 은색 양푼에 이것저것 넣고 참기름을 한 숟가락 넣었다. 내가 수저로 우적우적 밥을 씹어대자 엄마가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내게 물으셨다.


  “근데 그 킹받는다는 말이 무슨 뜻이니?”


  나와 내 동생은 ‘킹받는다’는 말을 집에서도 자주 쓴다. 딱히 엄마를 따돌리려고 썼던 말은 아니었는데 친구들과도 매번 자주 쓰는 말이다 보니 집에서도 습관처럼 킹받는다는 말을 쓰게 되었다.


  “아··· 그게 이게··· 킹받는다는 거는 진짜 열받는다는 뜻이거든요? 근데 이게 그냥 열받는 게 아니야···음 그러니까···”


  나는 비빔밥을 먹던 수저를 내려놓고 화려한 제스처를 취해가며 킹받는다의 뜻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게 열받는다는 건데 막 아주 심각한 상황에서는 잘 안 써요. 그러니까 장례식에서 쓸 말은 아니야. 장례식에 갔다가 화장실을 들렀는데 휴지가 없어. 이럴 때는 그냥 열받는다고 해야 돼요. 킹받는다는 말 쓰면 안 돼. 킹받는다는 건 좀 유쾌한 열받음이에요. 화가 났는데 그게 좀 유쾌한 거야. 좀 가볍고 즐겁게 화났다는 표현을 하고 싶을 때 쓰는 말이야. 감이 오세요?”


  “유쾌한 열받음?”


  “응. 그러니까 내가 늦잠 자고 일어나서 팬티만 입고 거실에서 체조할 때. 그때 엄마가 드는 생각. 그게 킹받는 거야. 나도 알아요. 나 킹받는 거.”


  “음. 이제 좀 알 것 같다.”


  엄마는 표정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엄마랑 소통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엄마도 그래 보였다.


  “엄마, 그럼 엄마한테 미션 하나 줄게. 오늘 하루 안에 ‘킹받는다’는 말을 응용해서 써 봐요.”


  엄마는 알겠다고 하셨다. 나는 미지근해진 비빔밥을 억지로 삼키고 다시 도서관으로 향했다.



  집에 와서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보고 있는데 키스 장면이 등장했다. 나는 그런 장면에 내성이 전혀 없었다. 나는 그런 오글거린 장면을 볼 때마다 방으로 들어가거나 거실에서 고래처럼 높은 소리를 내질렀다. 그건 비명에 가까웠지만 사실은 환호였다. 내가 부끄러움에 몸 둘 바를 모르면서 몸을 베베 꼬다가 흐흐흐흐 하면서 변태처럼 웃기 시작하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엄마가 조용히 말씀하셨다.


  “너 막 그러는 게 진짜 킹받는다.”

  “어??”


  나는 엄마의 말을 듣고 숨 넘어가듯이 웃었다. 나는 신나서 방에 있던 동생을 불러와 말했다. “엄마가 나보고 킹 받는다고 했어!!! 엄마가 킹 받는다는 말을 썼다고!!!”

  그러자 동생도 숨넘어가듯이 웃었다. 너무 웃어서 배에 복근이 생길 것 같았지만 아쉽게도 복근은 생기지 않았다. 우리 셋은 즐거웠다. 단지 엄마가 킹받는다고 말해서였다. 키스신은 이미 끝난 지 오래였다.



  킹받는다는 말은 ‘이말년’이라는 작가로 활동했던 지금의 침착맨이 인터넷 방송을 하면서 쓰기 시작한 말이다. ‘킹받는다’는 말은 인터넷 방송에서 쓰기 시작한 용어인 만큼 아주 심각한 상황에서는 쓰지 않는다. 자매품으로 ‘킹정’은 ‘정말 인정한다’는 뜻이고 ‘킹리적 갓심’은 ‘합리적 의심’이라는 뜻이다. 97년생인 나는 Z세대로서 참 많이 쓰는 말이다. 물론 Z세대라고 해서 다 쓰는 말은 아니며 Z세대가 아닌 사람들도 쓰는 말이다. 일단 내 친구들은 모두 이 말을 알고 있다.


  비교적 가벼운 상황에 쓰는 말이지만 쓰는 사람마다 쓰임새도 천차만별이다. 어떤 사람은 강아지 똥을 밟았을 때 “아 진짜 개킹받네.”라고 말하지만 어떤 사람은 “아 진짜 열받네. XXXX”하고 더 격한 욕을 내뱉기도 한다. 하지만 아주 진지한 상황에서는 잘 쓰지 않는다. 만약 “나 남편이랑 이혼할 거야. 진짜 개킹받아서 같이 못살겠어.”라고 말한다면 그 자리는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해질 수 있다. 물론 상견례에서도··· 지양해야 한다.


  킹받는다는 말이 왜 이렇게 또래들 사이에서 자주 쓰일까에 대해 생각해봤다. 지금까지의 경험을 바탕으로 생각해봤을 때 킹받는다는 말은 자조적 유머의 맥락으로 쓰이는 듯하다. 조금 짜증이 나는 일일지라도 가볍게 웃고 넘길 유머로 해소하고 마는 것이다. 지금처럼 험난한 세상을 대하는 지혜로운 대처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우산 없이 길을 걷다가 폭우가 쏟아져도 “아 XX 열받네”라는 말로 자신의 기분을 더 망치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 갑자기 개킹받네.”라는 말로 그 상황을 시트콤의 한 장면처럼 연출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어느 게 더 좋은 자세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나라면 후자처럼 말할 것 같다. 어차피 비를 맞을 거라면 좀 더 유쾌하게 맞으며 집에 가고 싶다.


  신조어의 사용은 늘 장점과 단점이 공존해 왔지만 우리 엄마도 킹받는다는 말을 자주 쓰시니 우리 집에서만큼은 순기능을 하는 것이 분명하다. 좋은 건 나눠야 한다고 배웠다. 다음에는 엄마한테 ‘킹정’에 대해 알려드릴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세종대왕님은 킹정하실만 한 위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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