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몇 걸음만 걸으면 카페가 있어 온갖 음료를 바로 마실 수 있는 세상이 되었지만 내가 어렸을 때는 집집마다 TV 광고에서 나오는 맥심 커피와 프리마, 그리고 설탕 구성의 3개의 병이 준비되어 각자의 휘향대로 2:3:3 이든 2:2:3이든 믹스커피를 타서 마셨었다.
물을 부으면 달달한 향이 향긋했던 커피는 애들은 마시면 안 된다는 어른의 음료였지만 내 기억 속에서 어른의 음료는 커피가 아니라 노란 상자에 노란 티백 꽁지를 달고 있던 립톤 옐로라벨 홍차였다.
대학 입학 전 경양식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수프가 먼저 나오고 빵과 밥 중 선택을 하며 가게에서 직접 만든 함박스테이크와 돈가스 가게 정식까지.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추억의 경양식 가게였다.
그 가게에서 반년정도 일을 하는 동안 단 한 분의 손님만이 늘 홍차를 주문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마흔 중반을 향하는 내 나이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다. 홍차에는 레몬 한 조각을 띄워 나가는데 반달모양으로 자른 상큼한 레몬의 향기도 좋았고 레몬이 띄워진 채 아지랑이처럼 우러나는 홍차를 내갈 때면 홍차를 마시는 그분이 우아하고 멋있어 보여 홍차는 무슨 맛일까 하는 호기심이 들었었다.
어느 날 화장하는 엄마를 몰래 따라 하는 어린 여자아이 같은 마음으로 홍차를 우렸는데
"도대체 이 쓴걸 왜 마셔??"
한 모금도 못 넘기고 퉤퉤 그대로 싱크대에 부어버렸다. 나중에 홍차에 입문하고서야 그때 홍차를 버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게 되었는데, 지금이야 티백마다 몇 도의 온도에 몇 분을 우려라 하고 표시가 되어있어 적당히 우린 후 티백을 건져내는데 그걸 모르고 계속 담가뒀으니 얼마나 쓰고 떫은지 아직 달달함이 더 좋을 스무 살 입맛엔 한약보다 더 고약한 맛이었다.
커피 마시면 잠이 안 온다고 하는데 블랙커피도 잘 마시던 나에게 진정한 어른의 음료는 홍차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