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 안에도

등불이 있다

by 착길


고립 : 타인과 분리되어 멀어진 상태를 말한다. 심리적으로 타인에 대한 반감이나 접촉 공포를 말한다. 정신역학이론에서는 기억이 한 때 가지고 있었던 감정에서 멀어지는 방어기제라고 표현된다. (사회복지학 사전)




이십 년 전쯤, 나는 고립을 선택했다. 오랫동안 살아온 터전을 멀리 떠나오면서 깊은 상처에서 멀어지고 싶었다. 상처 깊은 마음은 가족이 있는 곳으로만 향했다. 미련 없이 짐을 쌌다. 시 만난 피붙이, 언니와 동생 곁으로 돌아온 안도감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엄마 품에 안긴 듯했다. 내 곁에 있어준 그녀들 덕분에 여기까지 왔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어리둥절한 현실과 발맞추지 못한 공부는 아득한 곳만 꿈꾸게 했다. 자발적인 고립은 자연스럽게 사회적인 고립을 낳았다. 다만 무엇을 하건 안 하건 곁에 가족이 있었다.


몸과 마음이 아팠다. 병원에서는 해결해주지 못했다. 오롯이 나의 몫이었다.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사회 속 일원이 되는 길은 내가 찾아야 했다. 우선 상처를 입었던 곳에서 멀어지니 살살 아물어 가는 듯했다. 겉은 아물어 갔지만 속은 그렇지 않았지 발길이 도서관과 서점으로만 향했다. 그곳에선 숨이 쉬어지고 마음이 편안했다. 책 속에 길이 있을 것만 같았다.


마음 닿는 대로 읽기 시작했다. 야생화나 나무 책에서부터 심리, 시, 소설, 불교서적들이 터널 안의 등불이 되었다. 그 무렵 나를 사랑하는 친구들이 함께 가자던 교회나 선물해준 성경엔 마음이 닿지 못했다. 러나 그녀들이 나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 안다. 자신이 아는 최고의 것을 나누어주려는 마음만은 지금도 고맙다. 나 역시 그녀들을 많이 아끼고 사랑한다.


닥치는 대로 읽었던 책들을 기록해두지 않은 게 아쉬울 뿐이다. 그때 만난 책 속의 문장들과 작가들이 마음에 남아서 브런치 작가님들의 책 리뷰를 읽을 때마다 그때로 돌아가곤 한다. 특히 헤세의 책 리뷰를 읽을 때마다 마음이 일렁인다. 내게 다가온 그의 소설과 시들이 기억에 다 남지 않아도 마음엔 그대로 담겨 있다. 다시 읽어야겠다.


고립의 문이 열리기 시작한 건 새 생명의 탄생을 함께 할 때였다. 나를 구하러 세상에 나온 듯 조카들은 내 마음에 사랑이 샘솟게 했다. 너무나 예뻤고 보고 있어도 보고 싶었다. 아이들 덕분에 터널 안에서도 웃을 수 있었고 행복했다. 아이들과 걷는 길이 꽃길이었다.


문이 열리기 시작하면서 마주한 건 자연이었다. 해와 가까운 도시에 살았기에 아름다운 저녁노을을 실컷 볼 수 있었다. 근린공원 걷기 운동은 몸과 마음을 단단하게 만들었다. 아기처럼 막 생긴 작은 공원이 자라는 것을 보면서 함께 성장하는 기분이 들었다. 나무나 작은 풀꽃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만큼 좋은 게 또 있을까 하며 좋아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함께 걸었다.


스스로 선택한 고립이 처음엔 낯설고 어렵고 외로웠다. 다행스럽게도 나를 있는 그대로 봐주는 가족의 품 안에서, 고 생각하고 걷고 생각하서, 본래의 나를 은 듯했다. 그래서 씩씩하게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다.




다시 고립되었다.


이십 년 만에 다시 만난 고립감이 잠잠했던 나를 건드린다. 번엔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한 고립이다. 바이러스에 의한 고립은 또 처음이라 하루하루 견디며 살아갈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그때의 고립은 가족이 품어 주고 홀로 헤쳐나가는 상황이었다. 지금은 가족을 품고 함께 헤쳐나가야 하는 상황이다. 같은 듯 다르고 다른 듯 같다.


그때는 주로 글을 읽었고 지금은 주로 글을 쓴다. 그때는 책 속에 길이 있다고 믿었고 지금은 글을 쓰며 길을 만든다. 그때는 운동화 바닥이 닳도록 걸었고 지금은 가볍게 동네 산책을 한다. 그때는 족이 내 곁에 있었고 지금은 내가 아이들 곁에 있다.


자의든 타의든, 고립된 상황라도 작은 등불이 있고 기댈 사람이 있다는 걸 경험했고 체험하고 있다. 항상 함께 하며 돕는 자신이 있다는 것도 안다. 지켜주는 이가 있을 때보다 지켜야 할 이들이 있을 때의 불안과 두려움은 말도 못 하게 크다. 이전에 느끼지 못한 불안과 두려움은 또 다른 힘이 나오게 하는 걸 우리는 하루하루 견디면서 아는 중이다. 고립은 가만히 멈춘 자신을 마주하게 하기 때문에 넓게 알려주지 못해도 깊이 알려준다. 나를 깊이 들여다볼 거울을 만나게 해 준다. 상처에서 벗어나고자 선택한 고립이 거울을 보여주었기에 피하고만 싶던 상처도 쓸모 있게 되었다.


미치지 않으려면 미쳐야 했던 지난해 여름엔 브런치를 만나 세상과 글에 더 가까워졌고 겨울엔 운전을 배우면서 세상과 길에 더 나아갈 수 있었다. 이십 년 전 되새기며 고립된 터널에서 등불이 될만한 것들을 찾아 헤맨 덕분이다. 발밑의 풀꽃들이 다시 말을 걸어왔고 늘 곁에 서 있던 나무들과도 오랜만에 인사했다. 가까운 것들이 잘 보이는 안경을 낀 듯, 안 보이던 것들이 크고 밝게 보였다. 까만 하늘의 달도 유난히 크고 밝았다.


언젠가 이 고립 안에서 만난 것들의 의미를 되새길 날도 오리라 믿는다. 지금은 나를 깊게 비추는 다른 등불을 찾을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