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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변 Dec 21. 2017

불공평한 세상의 변호사

주어진 것들에 대한 책임

나는 일을 고를 수 있는 변호사다.


업계가 어렵다고 난리인데, 큰 욕심 없는 한, 다행히 내키지 않는 일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자리를 잡았다. 사무장에게 소개비를 줘 가면서(<-만연한 불법) 말도 안 되는 사건을 맡아 거지같은 서면을 쓸 필요도 없고, 내 능력에 이제는 어느정도 자신도 있다. 변호사가 필요한 분이 오셔서 일을 맡기면 성실히 일을 하고, 무리한 바람이나 질문을 받으면 왜 안 되는지 찬찬히 설명을 해 드리고, 사건의 난이도를 판단한 후 내 생각에 양심적인 시장가를 제시하고, 깎으려는 분이나 못 믿겠다는 분 계시면 그저 가던 길 마저 가시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번 돈을 나를 위해 잘 쓰고(고기...초컬릿...) 사무실 직원의 생계안정과 양질의 사업장 운영방안을 고민하고, 학교 안팎에서 공부를 계속하고 집회에 가거나 후원금을 내거나 공익사건 상담과 변론과 발제를 하거나 UN절차에 참여한다.


그런데 이런 삶이 가능한 이유를 냉정히 따져보면, 시작할 때부터 나에게 소극재산(?)이 없었다는 것은 유일하지는 않아도 큰 이유이다. 나는 소위 학벌이나 스펙에서 밀리지 않았고, 자산은 없어도 큰 빚을 갚아야 할 처지도 아니었고, 부양가족도 없었다. 어쨌든 생계를 유지할 만한 다른 직업도 이미 갖고 있었다. 즉, 전문직 자영업자로 시작한 시점에, 나는 이미 "뜻을 이루면 좋지만 안 된다고 죽지는 않는"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의 일을 할 조건이 주어져 있으니 굶을까봐 그 직업적 완성도나 개인적 자존심을 무너뜨려가며 무리할 위기가 없었다.


이건 내 능력이 아니다. 능력이 아니라, 따지자면 계급이다. 내 것이 아니다. 능력이 있어야 기회도 온다, 운도 노력해야 온다, 감사한 말이지만, 그냥 하고 싶다고 밥과 집 걱정 없이 하루 열 시간을 비생산적 공부만 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내 힘이 아니다. 개업 초기 한가할 때, 먹고 살 걱정에 잠을 설치거나 대출을 알아보는 대신 근처 투쟁 현장을 돌아다니며 앉아 있거나 대학원을 다니고 있었던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이 내 힘이 아니다.



성적으로 삶의 기회를 재단하는 나라에 지극히 우연히도 원래 공부를 즐기는 성격으로 태어났고 이를 이해하고 지지하는 부모 밑에 자라났고 이상을 응원하는 가족을 만나고 만들었다. 그 모든 지금까지의 과정에서 죽, 나는 사회의 자원을 더 많이 소모해 온 쪽임을 자각하고 있다.

변호사니까 공적 책임이 생기는지는 모르겠다. 법은 제도를 지탱하는 그물이니 그런 지점도 있다고 생각은 한다.


하지만 그보다 작은 스케일로, 나는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고 느껴왔다. 세상은 나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불공평했다. 그러므로 나는 내 삶에서 내 나름의 방식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주관적으로 만족스러운 삶을 사는 사람에게 무언가 사회적 책임이 없다면 직관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성실히 일한다. 할 수 있는 일은 하려고 한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한 세상이 오는 중은 아닌가 두려워하면서도, 일단은 이 정도의 자리에 그냥 서 있다.


(2014년 겨울에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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