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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aMya Aug 17. 2021

천천히 보다

Thy National Park

율랜드 섬의 북서쪽에 위치한 THY는 덴마크 최초의 국립공원이라고 한다. 일주일을 묵었던 AGGER는 면적이 244 km2나 되는 THY 국립공원 안의 작은 도시였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아래 푸른 바다, 매혹적인 산세, 푸른 숲으로 병풍 두른 초록빛 호수, 작렬한 태양. 눈을 감아도 떠오르는 서유럽의 풍경이다. 그러한 풍경들은 감상의 틈도 주지 않고, 눈에 들어오는 순간 입을 벌려 감탄하게 하고 반하게 한다. 뿐만아니라 화려한 중세 건축물과 오래된 부흥의 흔적 역시 여행객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거기다 미소를 가득 담은 얼굴로 눈인사를 하고, 크게 웃고, 과장된 몸짓으로 긴장을 풀어주는 사람들의 유쾌함까지 더 해지면 서유럽은 비현실적인 행복감을 경험하게 해 준다. 


하지만 북쪽 유럽인 덴마크의 풍경은 극적이지 않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탁탁 마음에 불이 일어나게 하는 그런 풍경이 아니다. 이번 여행지인 244 km2 규모의 THY 국립공원 가운데 서서 한 바퀴를 돌아보았는데, 앞으로 가도 뒤로 가도 다를 것 같지 않은 한결같은 풍경이었다. 이쪽으로 달려도, 저쪽으로 달려도 비슷하고 낮은 풍경이 끝없이 펼쳐질 뿐이었다. 여기저기 맛집이 있는 것도 아니고, 특산품을 파는 아기자기한 상점이 있는 것도 아니다. 눈이 닿는 곳은 온통 드넓은 초원이거나 영원할 것 같은 모래사장뿐이었다. 

덴마크에서는 이전과는 다른 놀기 전략이 필요하다.

느지막이 일어나 인접한 동네 구경을 다녔다.

서핑으로 유명한 Kiltmøller, 덴마크 최대 조업이 이루어진다는 항구 도시 Hanstholm, 100년 넘은 어부들의 마을이 보존되어 있는 Stenbjerg, 1884년부터 어부들의 길잡이가 되었다는 오래된 등대가 있는 Lodbjerg, 2차 대전 사용되었던 벙커가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Vigsø Batteriet 해변, 북서쪽 율랜드에서 제일 번화하다는 Thisted을 돌아보았다. 모두 Agger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차로 30-40분이면 닿을 수 있는 지역이다.

서핑으로 유명하다지만 Kiltmøller 해변에는 차 스무 대 정도 주차할 수 있는 작은 주차장이 꽉 차는 정도의 사람들이 모여 서핑을 즐기고 있었다. 바람도 불고 마침 소나기가 내렸지만, 비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서핑도 하고, 산책도 하는 언제나처럼 차갑고 진지한 표정의 사람들을 따라 우리도 소나기에 젖으며 해변을 걸었다. 분위기가 중요하다. 아무도 비를 피하지 않으니 비를 맞는 게 하나도 나쁘지 않았다. 시원했고, 신발에 물이 들어갈까 봐 종종걸음을 하는 서로가 재밌었다. 비를 거르며 서핑하는 사람들을 보고 딸은 서핑을 시도해 보리라 결심을 하기도 했다. 구경 삼아 하나 있는 식품점에 들어갔는데 훈제 생선을 팔고 있었다. 북유럽 답게 가격은 사악했지만, 깔끔하고 예쁘게 생긴 연어와 처음 보는 훈제 새우의 선명한 붉은빛이 식욕을 돋웠다. 마늘향 훈제 연어, 후추가 곁들여진 훈제 고등어, 차갑게 먹는 훈제 새우를 맛보았다. 기대 이상이었다. 지금까지 먹어본 훈제 생선중에 단연 최고였다. 짜지 않고, 달착지근하고, 마늘향, 후추향이 은은했고, 육질이 탱탱했다. 훈제 생선이 이런 맛일 수도 있다는 놀라운 경험, 덴마크에서도 음식을 먹으며 맛있다 맛있다 할 수 있다는 뜻깊은 경험이었다. 

Hanstholm은 생선 경매소와 조업에 필요한 각종 도구를 판매하는 상점이 모여있어 주변 다른 도시에 비하면 조금 더 활력이 있다. 공기를 가득 채운 비릿한 생선 냄새가 과연 유럽 전역으로 생선을 수출하는 문이라는 Hanstholm 항구답다. 생선 냄새를 따라온 튼실하고 건장한 갈매기들을 쫓아가며 큰 어선들 사이를 어슬렁 거리며 구경했다. 그 많은 생선을 잡아서 수출을 하는구나. 바다 가운데 있고, 이렇게 큰 항구도 있는데, 사실 덴마크 사람들은 생선을 아주 즐기긴 않는 것 같다. 연어, 고등어, 대구 정도를 주로 먹지만 그것도 고기에 비하면 훨씬 못 미치는 정도의 소비를 한다. 여러 번 덴마크 사람들에게 이유를 물었는데, 고개만 갸우뚱한다. "글쎄, 왜 그러는지 모르겠는데, 나만해도 고기를 더 먹는 편이야." 바다 염도가 낮고, 물이 차서 서식하는 물고기 종류가 많지 않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오징어, 게, 홍합, 가시 발 새우, 대구, 가자미 같이 아는 생선은 다 잡힌다. 덴마크 사람들도 잘 모른다고 하니 덴마크 사람들이 생선을 많이 안 먹는 이유를 나도 더는 알려고 하지 않겠지만, 수출 덜 하고 국내 시장에 좀 풀어주면 우리는 참 좋겠다 생각을 해본다. 

100년 넘은 어부의 마을 Stenbjerg landingsplads에는 지붕이 낮은 어부의 집들이 박물관처럼 보전되고 있다. 펼쳐진 바다는 너무 넓은데 옹기종기 모여 있는 까만 지붕 하얀 벽의 집들은 너무 작다. 어떤 마음으로, 어떤 사람들이 이곳에 집을 짓고 어부가 되어 살았을까, 그 사람들의 일상은 어땠을까, 느리게 흐르는 생각을 따라 멋대로 그들의 삶을 그려보았다. 당시의 배가 보전되어 있는 박물관도 있고, 당시 사진들과 조업 용품들을 모아 전시하는 박물관도 있다. 지역 주민들이 이 작은 어부 마을을 보존하기 위한 모임을 만들어 자원봉사로 박물관을 관리하고 행사를 주관하기도 한다고 한다. 바다, 집 몇 채에 대한 사람들의 애정이 이 작은 어부 마을을 더 특별하게 해주고 있다. 깨끗한 모래사장과 작은 어선, 작은 집의 풍경은 극적일 것이 하나도 없지만 오래 여운을 남겨주는, 돌아보게 하고 떠올리게 하는 풍경으로 남았다.

Lodbjerg에 가는 길에 길을 잘못 들어 (황가수 주 특기이다) 오프로드를 만났다. 국립공원 한가운데 주행은 가능하지만 길이 깔리지 않은 길을 하필이면 구글이 찾아주었고, 황가수는 줌 인 해보는 번거로움을 거부하는 바람에 오프로드로 들어와 버린 것이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달렸다. 이름 모를 새, 나비, 들꽃들이 놀랠까 빨리 달릴 수가 없었다. 포장된 도로에서도 차보기 쉽지 않은데, 오프로드에는 우리 밖에 없다. 어쩌다 보니 사파리 경험을 하는 기분이었다. 오프로드 끝에서 만난 등대는 그냥 등대였지만, 온통 초록색의 THY 지역의 평화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등대를 중심으로 하이킹을 하는 여러 루트가 있어, 하이킹하는 사람들이 모여 저마다 지도를 보며 루트를 정하고 있었다. 하이킹 계획은 없었지만, 다른 계획도 없었기에 우리도 걸었다. 앞으로 앞으로 들판을 지나 걸었다. 아까 보았던 하이킹객들은 다른 루트를 찾았는지 아무도 없이 또 우리만 있다. 구글 지도도 더 이상 길을 알려 주지 못하는 들판을 걷다 보니 말이 없어졌다. 딸아이는 재미없는 걷기에 투정을 부리기도 했지만 들꽃을 꺾어 아빠 머리에 꽂아주며 원기를 되찾았다. 머리에 꽃을 꽂았지만 봐주는 사람 하나 없는 들판을 걸어 모래 언덕을 올라 아래로 펼쳐진 바다를 보고 다시 돌아왔다. 여전히 낮고 넓은 이 풍경에 감탄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지만 조용한 초록색 풍경이 선물하는 깊은 평화로움을 맛보았다.

THY 지역에는 2차 대전 당시 벙커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그중 몇 벙커는 Vigsø 해변에 남아있다. 2차 대전 당시 덴마크를 점령했던 나치 군인들이 외부의 적들로부터 해안 도시들을 지키기 위해 만들었다는 벙커들이다. 해안 침식으로 바다에 잠겼거나 잠기고 있는 벙커들이 있기도 하고 아직도 모습을 완전히 드러내고 있는 벙커들도 있다. 아픔의 흔적인 벙커들 사이에서 수영을 하는 예쁜 아가씨들의 모습이 영화처럼 각인되었다. 역사는 흐르고 새로운 사람들이 태어나지만, 기억되어야 하는 상처가 있다. 

Thisted은 주변에서 제일 큰 도시 느낌이 났다. 중앙 광장도 있고, 쇼핑센터도 있다.  단 며칠 초록색 평화를 경험했을 뿐인데, 도시 느낌이 생경했다. 심심하고 느린 풍경이 스몄나 보다. 좁은 골목에 알록달록한 건물들을 구경하다 점심을 먹으러 식당으로 들어간 사이 하늘이 열린 것처럼 많은 양의 비가 내렸다. 해변가 식당의 야외 식탁이 바람에 날아가고, 차들이 물에 잠기는 일이 20분 정도 사이에 일어났다. 딱 20분이 지나고 비가 그치고 하늘이 말갛게 개었다. 위협적으로 내리는 비를 보면서 사람이 얼마나 작은가, 자연이 얼마나 큰가 숙연해지기도 했지만, 말갛게 개인 하늘을 확인하고 비 온 뒤 바다 물놀이를 했다. 그지없이 가벼운 게 사람이다.

Agger 해변에는 길게 보호 사구를 설치해 두었다. 파도가 크게 치는 날 보호 사구 위에 나란히 서서 세상을 삼킬 것 같은 파도를 구경했다. 키보다 높은 파도가 댐에 부딪쳐 부서지면서 물을 뿌렸다. 파도 소리 때문에 서로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손을 꼭 잡고 물을 맞으며 무서운 파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먹구름과 노을이 뒤섞여 장관을 이루는 하늘과 크게 입을 벌리는 바다는 장엄했다. 빨려 들어갈 것 같았던 풍경과 서로 잡은 손의 온기가 더할 나위 없이 짜릿했다. 

그제야 한 결 같기만 했던 이 풍경에서의 자극을 조금 알 것 같았다.

양쪽으로 펼쳐진 너른 바다 덕에 AGGER 지협을 지날 때는 물 위에 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처음 보는 지협이라는 지형이 물 위를 걷는 느낌을 준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동네 집집마다 작은 스탠드를 설치해두고 갓 수확한 햇감자를 팔고 있었다. 혹시 감자 말고 다른 걸 파는 집이 있지 않을까 기웃거려 보았지만, 감자 파는 집이 여덟이면, 감자와 꿀, 혹은 산딸기 파는 집이 둘쯤이다. '아무리 감자가 좋아도 그렇지, 이 감자를 누가 다 사' 했지만 오후가 되면 아침에 내어 놓았던 감자들이 다 없어진다. 덴마크 사람들은 참 감자만 좋아하는구나. 

오며 가며 눈인사를 하던 동네 주민에게, 겨울에도 Agger를 찾는 여행객이 있는지 물었다. 내 의도는 겨울에는 여행객도 없을 텐데, 여행객 상대로 식당도 하고, 상점도 하는 주민들이 힘들지 않은지 알고 싶었던 것이지만, 겨울에도 여행객이 온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겨울에 여기 오면 뭘 해요?"

여기서 사는 사람에게 이런 질문을 하다니, 무례하기 짝이 없구나.

"아, 내 얘기는 겨울에 오면 춥거나..."

다행히 내 질문이 언짢지 않은 듯 웃으며 대답한다.

"자연은 계절마다 변하니까, 겨울의 자연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있어요. 겨울에만 오는 새들도 있고, 해가 일찍 지는 겨울 밤하늘도 다르고, 겨울 바다의 풍경도 여름의 그것과는 다르니까요."

계절을 지내는 자연이 궁금한 사람들, 낮고 넓은 심심한 풍경을 천천히 보며 다름을 깨달을 줄 아는 사람들에게만 허락하는 자연의 선물이 있을 것이다. 그 느린 평화로움을 경험하며 한 걸음 더 자연스러워지는 자신을 알아차리는 기쁨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모르는 무수한 무언가 들이 있을 것이다. 


설렁설렁 나들이를 다녀도 시간이 아주 넉넉했다. 숙소 앞으로 찾아드는 새들에게 빵을 던져주거나, 도망도 안 가는 개구리를 관찰하고, 풍선 50개에 물을 담아 물 풍선 전쟁을 하고, 바닷가 모래 언덕에 자리를 잡고 바닷속으로 사라지는 해를 구경하고, 매일 하염없이 걸었다. 다르지 않은 것 같았던 풍경이 드디어 다 다르다는 것을 조금 알게 될 때쯤, 느리고 한산한 놀기의 묘미를 알 때쯤 예정되었던 일정이 끝났다. 

과묵하고 평화로운 풍경을 꼭 닮은 덴마크 사람들을 흉내내며 일주일을 무던하게 놀아보았다. 노는 건 어디서나 좋고, 어떻게 해도 좋다는 깨달음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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