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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aMya Apr 30. 2021

최상을 양보한 의료복지

작은책 5월호


‘요람에서 무덤까지, 복지 천국’ 과 같은 말들은 ‘행복한 나라’ 다음으로 많이 덴마크를 따라 다니는 수식어들이다. 이와 같은 화려한 수식어에 걸맞게 의료 제도 역시 통 크게 무상이다. 무상 의료는 덴마크만의 특별한 제도는 아니다. 유럽의 대부분 국가들이 유사한 형태의 무상의료를 시행하고 있다. 최근 코로나19에 대한 유럽의 대응을 놓고 무상의료의 허점을 드러냈다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무상의료가 아니었다면 유럽은 더 많은 희생을 치렀을 것이라고 본다. 유럽의 코로나 대응의 문제는 인권과 자유의 가치를 우선하다 보니 마스크 쓰기와 집회 금지가 잘 이행되지 않고, 사생활 존중이라는 이유로 역학 조사를 못하고 있고, 경제적 어려움과 관료들의 욕심 등의 이유로 공공의료에 충분한 예산을 집행하지 못하기 때문이지, 무상의료 자체의 문제로 보기는 어렵다.

유럽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무료 출산을 했고, 아이가 아플 때 마다 진료비 내지 않고 진료를 받아왔으니 나 또한 무상의료의 실제 수혜자다. 교민 분들 중에는 신생아 인큐베이터 입원, 암 수술, 만성 심장 질환 치료를 무상으로 받으신 분들도 계시다. 돈 걱정 않고 건강을 회복하시는 분들의 소식을 들으면 나도 덩달아 안도하게 된다.

덴마크는 복지 선진국답게 유럽의 의료 복지에서 한발 더 나아가 18세 이하 어린이와 청소년에 대상으로 무상 치과 치료를 제공한다. 소아 치과는 보통 초등 학교 건물 안에 있고, 아이들은 학교 생활 중에 수시로 학교 건물 내에 위치한 치과 진료실을 찾아 치료를 받을 수 있다. 학교 건물 안의 치과가 친숙하기도 하고, 치료를 받으면 작은 장난감 선물까지 받을 수 있어 아이들은 치과 가기를 즐겨 한다. 딸아이 역시 충치가 없어 굳이 치과에 가지 않아도 되지만 자원하는 마음으로 벌써 몇 차례 검사를 받으러 치과에 다녀왔다. 엑스레이 시설까지 갖춘 완벽한 학교 안 치과 진료실에서는 충치 치료, 발치, 교정까지의 모든 치료를 무료로 받을 수 있다. 치료비 걱정 없이 언제든지 치과 치료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아이 키우는 부모의 큰 부담을 덜어준다.

또한 덴마크의 공공의료는 덴마크어가 서툰 이민자들을 위해 무료 통역 서비스를 제공한다. 덴마크어 혹은 영어로 소통이 불가능한 경우 국가에서 보내주는 공공 통역관의 도움을 받아 진료를 받을 수 있다. 실제로 타 유럽 국가의 교민들은 언어 문제로 병원 진료에 어려움을 겪는 일이 많은데 비해 덴마크의 의료 통역 서비스는 이민자들에 대한 감탄할 만한 실제적이고 세심한 배려이다.

하지만 교민의 입장에서 이토록 대단한 의료 복지도 칭송의 대상이기 보다, 불평의 대상일 때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의료복지 선진국이라지만 병원 가기는 한국에서 보다 몇 배 어렵다. 배도 아프고 머리도 아픈데 주치의와 약속을 잡아 진료를 받으려면 하루는 기본이고, 보통 2-3일은 기다려야 한다. 혼자 끙끙 앓다 주치의를 만나는 날에는 이미 증상이 사라져 진료 예약을 취소하기도 한다. 아이들도 어지간히 열이 나거나 눈에 보이게 심한 증상이 아니면 해열제 처방도 안 해준다. 열이 올라 얼굴이 빨갛고 콜록 콜록 기침하는 아이를 데리고 주치의를 만나러 갔다가 ‘며칠 집에 데리고 있으면서 충분히 수분을 공급해주라’는 병원 안가도 아는 얘기를 듣고 돌아올 때는 어김없이 울화가 치민다. 실제 아이를 며칠 집에 데리고 있으면 기침도 사그라지고, 열도 내린다. 그러니까 의사의 그 신묘한 처방이 들어맞은 샘이기도 하지만 아픈 아이를 데리고 증상이 나아지기를 속수무책으로 기다린 다는 것은 엄마에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유럽 사는 교민들은 주치의 앞에서 연기 실력이 보통이 아니다. 어렵게 주치의를 만나면 일단 무조건 실제 증상의 곱하기 2 정도로 아픈 시늉을 해야 약이라도 하나 얻어먹고, 엑스레이라도 한번 찍을 수 있다는 것을 다들 살면서 익혔다. 한 이틀 앓았어도 주치의 앞에서는 사나흘 앓았다고 하거나, 어지간한 기침에도 기침 때문에 며칠 밤잠을 설쳤다고 어쩔 수 없는 과장을 한다.

덴마크로 이사했던 첫 해 가을에 딸 아이 눈가에 아토피 혹은 알레르기로 의심되는 붉은 반점들이 올라왔었다. 아이가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눈가를 긁어대는 것을 보고 놀라 주치의 진료를 예약했다. 3일을 기다려 주치의를 만나는 날이 되었는데, 아이 눈가의 반점들은 거짓말 같이 사라졌고, 아이를 괴롭히던 간지러움 증세도 가셔버렸다. 비록 증상은 없어졌지만, 예방 차원에서 일단 주치의를 만났다. 주치의에게 지난 증상을 설명했고, 아토피 혹은 알레르기가 의심되는 만큼 갑자기 증상이 나타날 경우 어떻게 하면 좋을지도 물었다. 주치의는 증상이 없으니 당장은 어떠한 처방도 해 줄 수 없고, 다음에 같은 증상이 나타나면 긴급 진료 시간에 예약 없이 바로 찾아오라고 안내를 해주었을 뿐이다. 나는 아이가 잠을 못 잘 정도로 힘들어 했던 상황을 다시 한번 설명하고, 응급 상황을 대비한 연고를 처방해 줄 수 있을지 물었지만, 병증을 보고 진단을 한 후에만 처방이 가능하지 예상만으로 처방을 할 수는 없고, 아토피 혹은 알레르기라는 비전문가(여기서 비전문가는 걱정이 태산인 아이 엄마인 내 얘기다)의 소견을 바탕으로 진단을 하는 것은 더더욱 안될 일이라고 딱 잘라 답했다. 차갑기가 딱 북유럽 날씨 같은 의사의 태도에 아이가 어릴 때 한국에서 체험한 소아과가 떠올라 문득 서럽기까지 하였다. 당시 생 후 6개월이었던 아이는 수시로 귀를 긁어 댔고, 급기야 귀에 작은 딱지가 않고 말았다. 미숙한 엄마였던 나는 작은 귀에 앉은 작은 딱지에 소스라치게 놀라 예약도 없이 (예약 않고 병원문을 여는 그 기분은 유럽 사람들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동네 소아과를 찾았는데, 친절한 선생님께서 아이들은 졸릴 때 머리도 긁고 귀도 긁는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려주셨고, 덤으로 부작용이 적은 스테로이드제 연고도 처방해주셨다. 아이들이 졸릴 때 귀를 긁기도 한다는 설명을 듣고 다시 보니, 신기하게도 아이는 정말 졸릴 때만 귀를 긁고 있었다. 태산 같은 걱정이 사라지니, 아이의 빨간 귀는 연고를 바를 정도로 심각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연고는 미숙한 엄마의 마음의 최종 병기 같은 것이어서 볼 때 마다 나의 심신을 안정시켜 주는 효과를 발휘했다. 아이는 요즘도 환절기 마다 하루 정도 눈이 가렵다고 하지만, 그 문제로 주치의를 다시 찾지는 않는다. 아이가 눈을 긁지 않도록 눈가에 부채질을 해주며 한국의 소아과를 이따금 그리워할 뿐이다. 

이렇듯 덴마크의 무상의료는 완벽하지 않을 뿐 아니라 불편하기 짝이 없다. 그럼에도 덴마크 국민들은 자국의 국가 의료 시스템을 지지하고 있다. 국가 의료 시스템에 대한 국민 신뢰도는 2020년 말 자그마치 71%를 기록했다. 나와 가족에게 건강상의 큰 문제가 생길 경우 치료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은 분명 스테로이드제 연고보다는 큰 위안일 것이다. 또한 생계 걱정 없이 꾸준히 만성질환 치료를 받을 수 있고, 갑작스런 가족의 질병에도 치료비 때문에 남은 가족들의 생활이 무너지지 않을 수 있다는 믿음은 많은 불안을 해소해 줄 것이다. 이들은 어쩌면 사회 구성원 모두가 당연히 치료 받을 수 있는 권리의 대가로 어느 정도의 불편은 묵묵히 견뎌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함께 건강하기 위해서는 불편을 나누어 가지는 희생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어지간한 병세는 치료보다 자가 면역에 희망을 걸어야 하는 불편한 의료이기 때문에, 모두에게 골고루 돌아가는 무상의료가 가능한 것이다. 덴마크의 무상의료를 경험하며 복지는 안락과 행복이기 전에 최상을 양보하고 보편의 행복을 선택하는 사회적 약속임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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